parallel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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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아래를 달리는 무법자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슬로건을 내건 미중년의 남성이 대중을 매혹한다. 그는 야당과 정적에게 온갖 비난과 공격을 받았지만 재임에 성공했고, 그가 이끈 신자유주의 정권은 세계의 패권과 미국의 호황을 가져다 줬다. 그쯤부터 공산권 국가의 연대에는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자유 진영에 몸담은 모두는 부푼 가슴으로 승전고를 울리리라 기대했다. 유례 없는 황금기였다.

 그와 비슷한 시기, 아메리카 대륙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개혁의 바람이 불었다. 개혁을 이끄는 그 젊은 혁명가들은 지도층을 전복시켜 권력을 약탈하려는 게 아니라, 아예 역사를 탈취하고자 했다. 광기와 탐욕에 절여진 시간을 으깨어서 역사에 밴 핏물을 모두 지우고자 한 것이다. 마법 사회에 빌붙어 사는 모든 마법사의 뇌 한 부분을 도려낸다는 건 야심에 젖은 계획이다. 유례 없는 찬탈기였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그 찬탈은 성공했다. 이제 마법사는 아레나 위에서 서로를 죽고 죽이는 조공인을 관람했던 역사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그들은 살인에 동조하지 않았고, 폭력에 메스꺼움을 느꼈으며, 피에 열광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마법을 쓰지 못했다.

 그 젊은 혁명가들은 찬탈에는 성공했지만, 그들이 멸시하면서도 사랑한 동족을 그만 멸종시키고 만 것이다.

 

 미 전역에서 유서 깊게 애용하는 경찰차로는 포드사가 내놓은 크라운 빅토리아가 있다. 부품 수급과 정비가 쉬워 플릿 차량으로 대량 공급이 용이하고, 국토 대부분을 수호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행정력으로 경찰차가 서의 역할을 겸비하는 고질적인 미국의 구조상. 차체도 넓은 데다가 먼 곳을 주행하는 크라운 빅토리아는 그 능력을 인정받아 수십만 대가 널리 보급됐다. 안소니는 이 차에 무엇이 있는지 대략적으로나마 짐작이 가능하다. 센터콘솔 후측 거치대에 있을 산탄총과 방탄복, 고무탄과 소금탄. 그 외의 스피드건, 번호판 인식기, 티켓 발부기, 무전기와 사이렌 스피커폰 등…….

 물론 그건 안소니가 넘볼 수 없는 위치에 배치돼 있다.

 차량 앞좌석과 뒷좌석은 완벽하게 분리된 공간이다. 손목에 수갑이 차인 채 안소니는 뒷좌석으로 초대받았다. 창문에는 삭막하게 검은 철망이 처져 있고 뒷문은 안에서 열 수도 없다. 뒷좌석에서 괜한 헛짓거리를 하지 못하게 씌운 특별 시트에는 빈 공간이 없어 무언가를 숨기는 것도 불가능하다. 용의자를 호송하기 위한 이동 수단으로는 대단히 적합했다. 안소니가 뒷좌석에 배정받은 경위는 그가 납치사건의 유력 용의자기 때문이다. 눈썰미 특출난 행인이 한 제보가 빛을 발했다.

 다만 그 용의자 옆에는 피의자도 나란히 앉아 있다.

 용의자보다는 처우가 낫지만 그럼에도 적절치 못한 대접을 받게 된 카리스는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용의자랑 피의자를 같이 연행하는 건 또 처음 봤는데."

 카리스는 피의자 신분으로 수갑은 안 찼지만, 용의자와 같은 시트를 공유하는 건 똑같았다. 조수석에 앉은 젊은 경찰관은 정답게 대꾸해 줬다.

 "인력 부족이란 게 다 그렇죠. 제보를 받았는데 여기까지 당장 뛰쳐올 수 있는 인력이 저희밖에 없더라고요."

 "굳이 제가 이 경찰차에 타야 될까요? 저기 제 머스탱이 있는데."

 "죄송하지만 그 차 시트에 피 같은 게 묻어 있었다는 제보가 들어와서요. 이제 보니 피가 아니라 와인 같기는 한데…. 제보가 들어왔으면 일단 살펴보기는 해야 되거든요."

 A는 흘깃 백미러로 뒷좌석에 앉은 두 사람을 쳐다봤다. 공권력치고는 다감한 눈빛이다.

 "들어 보니까 두 분 친구 사이시라면서요? 페어웰 씨가 갑자기 실종되면서 좀 오해가 쌓인 것 같은데 서에 와서 간단한 조사만 받아 주세요. 그러면 금방 풀려나실 거예요."

 그가 가진 또 하나의 오해. 둘은 친구 관계는 아니었다. 사실관계를 정정하기 위해 카리스가 입을 떼려고 했을 때 안소니가 재빠르게 선수를 쳤다.

 "네. 감사합니다. 근데 조사는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릴까요? 제가 직장이 있어서요."

 "하하.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한 반나절?"

 이 새끼가 장난하나…. 를 함축한 시선으로 보던 안소니는 의례상으로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졸지에 용의자와 친구인 피의자 신세가 된 카리스는 얹짢은 기색이 됐지만 구태여 말을 보태지는 않았다. 수사가 길어진다면 이쪽도 경찰서에 붙들릴 시간이 길어진다는 건 응당한 수순이다. 곧 담배를 피우러 나갔던 중년 경찰관이 돌아왔다. 그가 자리에 앉아 벨트를 매자마자 경찰차는 뜸 들이지 않고 출발했다.

 

 

 안소니가 캘리포니아로 날아간 건 한 의뢰를 맡으면서다. 그 의뢰는 즉슨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K라는 인물의 뒤를 캐달라는 의뢰였다.

 의뢰자는 안소니와 같은 마법사로, 마법을 잃기는 했지만 축적해 놓은 재산은 많은 거부였다. 사내는 머글을 고용하기보단 머글 사회에 잘 녹아든 마법사를 부리고 싶어 했다. 머글은 간교하기 이를 데 없다고 험담한 걸 보면 머글을 신용하지 못하는 듯했다. 한두 대를 거치면 사라질 핏줄에 연연하는 것만 뺀다면야 그는 보수를 넉넉히 쳐 주는 이였고, 그 의뢰의 적임자로 안소니는 썩 괜찮았다. 안소니는 캘리포니아로 가 K의 뒤를 캐기로 했다.

 문제는 안소니가 캘리포니아로 가 K가 근무하는 회계 사무실에 직원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뢰자와 연락이 끊기면서 시작됐다.

 선수금으로 받아놓은 게 반의반. 나머지는 뒤를 다 캔 다음에 받기로 계약해 놓은 터인데 의뢰자가 행방불명 상태가 된 것이다. 받아놓은 선수금이 있기는 했지만 장기 거주금으로는 약간 모자랐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시점에 난데없는 헤드라이트가 안소니를 비췄다. 2년 만에 만나게 된 악우였다.

 나중에야 깨닫게 된 거지만 그건 악우가 아닌 악우의 가죽을 뒤집어 쓴 미지의 생명체였다. 물론 마법마저 사라진 마당에 그건 획기적인 사건까지는 아니었다.

 사람을 죽이고도 찬 적 없던 수갑이 손목에 걸려들었다. 홧김에 갈취했던 리볼버가 화근이다. 신변 보호용으로 가지고 다닌다는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카리스 페어웰을 납치한 유력 용의자로 낙인찍힌 안소니 지간테는 별말없이 수사관에게 두 손목을 내줘야만 했다. 손목에 차인 수갑의 감촉은 빼앗긴 리볼버만큼이나 싸늘했다. 졸지에 납치당한 피해자가 된 카리스가 옆에서 말을 얹기는 했지만 절차상 경찰서까지 연행해야 된다는 사무적인 답변만 들어야 했다. 카리스는 성의가 미달된 어조로 그거 참 안 됐네, 하면서도 주저없이 내빼려고 했으나 본인도 중요한 참고인이자 피의자기 때문에 서까지 같이 가 줘야 된다는 말을 듣고는 살짝 침울해했다.

 미국 경찰의 인계를 받는 프랑스인과 핀란드인. 한쪽은 억양이 지나치게 부드러웠고 한쪽은 억양이 지나치게 삭막했다. 출처 불분명한 여러 억양이 나도는 미국에서 그 억양은 크게 두드러진 강도는 아니었다. 경찰관이 수사를 위해 신분을 묻고 답했을 때 뒤늦게 억양에서 단서를 찾을 만큼 경미한 수준이다. 앞좌석과 뒷좌석은 엄폐물 비슷한 게 끼어 있어 너머가 보여도 손이 닿지는 않았다. 대화를 나누기엔 정다운 장소는 아니어도 목소리가 원활하게 들렸다.

 그랜드 캐니언과 인근 도시인 플래그스태를 잇는 길목은 포장도로기는 하지만 도로 중간중간이 울퉁불퉁하고 깨져 있어 차체가 몇 번이고 덜컹거렸다. 승차감을 고려해 만든 차종이 아닌 점이 컸고, 애당초 도로가 평평하지 못해 우측 바퀴와 좌측 바퀴 높이가 맞지 않아 차가 쉴 새 없이 들썩거렸다. 제법 우아하지는 못한 연행길이다. 이 정도면 보수를 할 만한데도 도로 상태를 보니 몇 년간은 계속 방치된 듯했다. 

 "하여튼 미국인들이란." 두 손에 수갑이 차인 프랑스인이 낮게 불평했다. 차체가 들썩거릴 때마다 수갑이 덜그덕거리는 소음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 옆에 앉아 있던 핀란드인은 심드렁히 받아쳤다. "프랑스인들도 느긋한 걸로는 어디 가서 지지 않던데." 프랑스인은 몸이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대꾸했다. "우리는 조금 느긋하게 군다고 죽지 않거든."

 지중해 국가는 대체로 자연의 지고를 정면으로 받아들였다. 그건 북쪽으로 조금만 건너간다면 선명하게 대비되는 배경이다. 차체가 덜컹거리는 게 잦아들자 안소니는 창 너머를 바라봤다.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저물어가는 빛이 더 잘 들어오는 자리는 우측이다. 우측에 앉아 있던 안소니는 뒤늦게 물었다.

 "자리 바꿀 걸 그랬나? 넌 햇빛 좀 오래 못쐤잖아."

 앞좌석에 앉은 수사관만 없었다면 둘은 다정하지 못한 해후를 충분히 맞이했을 것이다.

 "필요없어. 자기 몸이 중요하기는 했던 건지 중간중간 환기는 시켜 줬거든."

 "트렁크에서 받은 보살핌이 괜찮았나 보네. 너 그쪽 체질 같기는 해."

 "궁금하다면 너도 보살펴 줄 수 있어. 일단 시끄러우니까 입은 테이프로 막고…."

 뒷좌석에 앉은 외국인 둘이 목소리를 줄인 채 부족한 해후를 나누는 동안, 앞좌석에 앉은 수사관 둘은 계속해서 얘기를 나눴다. 조수석에 앉은 이는 과묵한 건지 운전석에 앉은 젊은 수사관이 거는 말에 대꾸만 했다. 그 수사관은 상관과 대화를 나누다가 뒷좌석에 앉은 아웃싸이더와 소시오패스의 (당연하지만 이 사실에는 무지하다.) 존재를 새삼스레 자각한 듯 싶다. 신호에 맞춰서 차가 멈추고 다음 신호를 기다릴 때쯤, 수사관이 말을 붙여왔다.

 "두 분은 어디서 만나셨나요? 신문에 대문짝 만하게 난 실종 사건이라 페어웰 씨는 꽤 열심히 찾았는데. 어쩌다가 그런 오해에 휘말리신 건지 궁금하기도 하네요."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스몰톡이다. 선행된 질문에는 굳이 머리를 굴필 필요가 없다. 카리스가 느직하게 대답했다.

 "학창 시절에 만났습니다. 학교는 다른데 교류회를 해서."

 그곳에서 두 자릿수의 학생들이 모였고 거기서 죽고 죽이는 살육전이 벌어졌죠. 모든 학생이 보호자 승인 아래 관람거리로 팔려나갔는데 저는 그 덕분에 제 집을 모조리 불태웠습니다…. 같은 전후 사정은 당연하게 배제됐다. 그는 이제 어엿한 성년의 남자였고, 어떤 말이 분란을 일으키는지 분명하게 구분했다. 옆에서 악우가 대답하자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안소니는 비식거리는 웃음이 새는 걸 참지는 않았다. 학창 시절. 어찌 보면 맞는 말이었다. 그와는 분명 학창 시절에 만났으나 그건 말단부, 즉 종단이라고 해도 옳은 시점이다. 외부에서 예상치 못한 충격이 가해진다면 의지와 무방하게도 무릇 변화란 정해진 노선이다. 

 "얘랑 골방에 들이박혀서 며칠 내내 대마초만 피웠거든요."

 둘은 대답하는 동안 서로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거짓말을 쳐야 될 때는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게 편했다. 마침 캘리포니아는 대마초가 허용된 주여서 허울 좋은 변명거리긴 했다. 안소니는 천연하게 변명을 이어갔다.

 "대마초 때문에 제가 헛짓거리를 좀 해서 오해 살 짓을 했네요."

 대마초란 단어만 뺀다면 이 또한 맞는 말이기는 했다. 천국에 가자고 운운하는 우승인이라니. 뇌 어느 부분이 파열되지 않았다면 감히 뱉지 못했을 기발한 발언이다. 그는 종잡을 수 없게 군 적은 있어도 그런 식으로 기발하게 굴지는 않았다. 그걸 알면서도 단박에 알아차리지 못했던 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구원에 현혹된다는 걸 알아서다. 삶이 채워져 있지 않고 비어 있는 인간이라면 응당 바닥에 떨어진 구원을 주우려 들 것이다. 그 구원이 파멸과 같은 곡선을 그리는 구원이라고 할지라도.

 

 어느샌가 그날로부터 여섯 해가 지나갔다. 그와는 변곡점에서 만나 그 순간을 지나치기 전과 후가 얼마나 극명하게 달라졌는지는 모르겠다. 익히 알고 지내던 이들을 단서로 한다면 분명 그에게도 어그러지고 뭉개진 부분이 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지금 당장 겉으로만 보면 그가 반듯하게 다 자란 남성의 얼굴을 한다고 해도 그 짐작은 흐릿한 부분 없이 명료했다. 경기가 끝난 뒤 모든 조공인은 서둘러서 자라야만 했다. 다 자라지 못한 조공인은 떠밀리 듯이 앞으로 나가다 넘어졌고, 다 자란 조공인은 자연스러운 성장이 아닌 기괴한 성장을 거쳐야만 했다. 그 시절의 조공인은 이제 모두 성년이 됐다. 강요된 성장으로 인해 바람직하지 못한 일면을 지녔다고 해서, 누가 그들이 자라지 않았다고 말하겠는가?

서로가 아니고서야.

 자동차도 편식을 한다지만 그 종류는 한정돼 있다. 휘발유, 경유, 아니면 DP. 오로지 인간의 편의를 목적으로만 탄생한 종이어서 그런지 입맛이 수더분했다. 빅토리아 시크릿은 경유 차량이고, 주유를 다 하는 데 2분이 소요되지 않았다. 인간은 그보다는 더 미식적이고 까다롭다. 내연 기관이 같다면야 같은 음식을 먹는 차와 달리 인간은 소화 기간도 같은 주제에 저건 맵다, 저건 짜다, 저거 먹으면 두드러기 올라온다, 등의 이유로 메뉴 한 번 고르는 데도 온갖 갈등이 소진된다. 다만 메뉴를 고르는 데 난항을 겪는 건 선택지가 많은 인간에게만 주어지는 편향된 권리였다. 이런 다운 타운에서도 멀리 떨어진 외지라면 선택지가 강요되는 면이 있다. 먹든가, 아니면 굶든가.

 근방에서 가장 가까운 음식점은 주유소 옆에 붙어 있는 음식점 두 개였다. 타코집과 햄버거집. 양자택일로만 이루어진 세계에서는 큰 갈등이 필요하지 않았다. 두 수사관은 간편하게, 지금 당장 배고파 죽겠다는 이유를 들어 햄버거집을 골랐다. 타코보다는 햄버거가 더 빠르게 나온다는 경험을 기반으로 낸 결론이다.

 "두 분 보니까 햄버거 집에서 이미 식사하셨던데. 아직 출출하지 않으시죠?"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젊은 수사관은 재빠르게 소리쳤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리고 문이 닫혔다.

 잠깐의 침묵 끝에 먼저 서두를 뗀 건 카리스였다. "원래 민중의 지팡이들은 국적을 가리지 않고 제멋대로인가?" 안소니는 작게 항의했다. "우리는 굶기지는 않았어…."

 두 수사관이 햄버거집으로 가자 귀를 가득 채우고 있던 말소리가 바닥났다. 그리고 남은 건 두 사람, 자그마치 해를 두 번이나 넘겨 갖게 된 독대였다.

 카리스가 제 몸을 찾자마자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난입했기에 대화라고 할 만한 건 제대로 나누지도 못했다. 기껏해야 왜 트렁크 안에 갇혀 있었는지에 대한 간단한 전후 사정 정도가 끝이었고, 그마저도 수사관이 총구를 들이대길래 끝은 흐지부지했다. 안소니는 새삼스레 그와 오랜만에 만났으며, 긴 시간을 두고 만나게 된 이라면 으레 입에 담는 관행어가 있다는 걸 기억한다. 어떻게 지냈어? / 만나서 오랜만이야. / 화교술의 부족으로 더 떠오르지는 않지만 대체로 앞과 비슷한 음절. / 반복…. 대략 이 순서였다.

 그러나 그것도 사회성이라는 게 넘쳐나는 사람끼리 답례품처럼 주고받고 하는 것이지, 현 상황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안소니는 무늬만 피의자인 악우에 관한 기억을 더듬는다. 경기가 끝난 직후 협회에 들어간 뒤로 카리스와 따로 편지를 나눈 적은 없었다. 우승자라면 심심찮게 소지하는 불치병과 정신병, 트라우마로 인해 주변과 모두 단절한 채 저택 안에서 칩거하는 케이스가 있기는 했지만 카리스는 그런 케이스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부분이 있었다.

 그는 협회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주기적으로 참석했고, 그 행사에서 긁어 부스럼에 가까운 발언이나 행동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말끔하게 처신하는 축에 가까웠다. 단지 언사에 배려가 결여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어, 그와 반대되는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과 있을 때면 상대가 시체처럼 질린 얼굴로 자리를 떴다. 간혹 발작적인 반응을 내비치는 경우 미친 새끼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기도 했다. 용케 그 혼잣말을 들은 안소니는 반응하지 않았지만 조금 웃기다고 생각했다. 미친 새끼.

 차라리 솔직하게 미친 게 나았다. 그럼 무슨 생각을 하는지 두개골을 깔 필요가 없으니까.

 안소니는 카리스와 반대되는 가치관을 지녔지만 사고방식 만큼은 분명 비슷한 구석이 있었고, 그건 거부감을 유발하지 않았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단절이라는 것도 타인과 깊게 이어져 있는 이만이 행할 수 있는 권리였다. 그와는 깊게 이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단절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도 오용에 해당한다. 그와 있을 때는 위선을 떨지 않아도 됐다. 관계가 절단나는 걸 피하기 위해서 저지르지 말아야 될 짓이랄 게 없었다. 그건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에게는 그런 관행어가 무용하다. 진실만을 두르고 대한다면 관계의 수명은 보장해 주지 않아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분명해진다.

 안소니는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었다. 엄지와 검지만을 피고 다른 세 손가락은 접는 고전적인 자세, 손가락을 카리스의 가슴팍에 겨눴다. 마지막까지 망설였으나 결국 실행에 옮기지 않은 짓이 있다. 이제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총을 쏘듯 기울어진 손가락이 천장을 바라보도록 움직이게 했다. 총을 쐈지만 총알은 날아가지 않았다. "나 사실." 손안에 감긴 리볼버의 감촉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관자놀이로 겨눠진 총구에 담긴 건 분명 살의였다. "너를 쏴 죽일 뻔했어." 장난기가 배어 있지만 그건 진심이다. 안소니가 일전 몸수색을 당하던 와중에 리볼버를 뺏긴 걸 알았던 카리스는 예상했다는 듯 태연했다.

 "네가 그 개버릇을 남한테 못줄 것 같긴 했어."

 놀랍지도 않다는 투였다. 누가 어조만 듣고 평한다면 먹던 샌드위치를 바닥에 떨어트린 실수에 관한 타박일 거라 예상할 것이다. 안소니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난 이제 사람을 못죽일 줄 알았는데." 정말 그랬다. 다시 한 번 누군가를 죽이게 된다면 그건 타인이 아닌 자신일 거라고 예감했다. 그 예감과 상반되게도 안소니는 경찰관에게 총을 건네받았고, 그 총의 탄창을 들여다봤다. 탄창 안에는 6발이 다 장전돼 있었다. 오발탄이 날아가지는 않으리란 걸 확인했다.

 "그건 아닌가 보더라고."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어렵지 않으니까."

 지나치게 평면적인 말, 위로는 아니었다. 안소니는 무심코 그 말에 소리 내서 웃고 말았다. 물론 그건 웃음이라기엔 지나치게 짧고 식어 있어 자못 냉소에 가까웠다. 간발의 웃음이 멎자마자 악우에게 쏘아붙인 말. "거짓말 치지 마." 끄집어내는 질문이란 오로지 심증에 기반한 질문이다. "정말 어려웠어?" 카리스는 지금 이 순간에도 유려하게 세공된 유리벽 같은 표정을 지키고 있다. 일전에도 느낀 거지만 그는 마땅히 느껴야 될 감정을 느끼지 못했고 적절히 반응을 취해야 될 때도 그러지 않았다. 지금만 봐도 그랬다. 쉽게 동요할 법한 질문인데도 그는 신중하게 대답을 고른다기보단 관조하듯 무심한 낯빛을 띠고 있고, 그 대답은 역시나.

 "아니."

 무구히도 사실이다.

 두 살인자는 서로를 마주 본다. 속 안에서 토기가 치밀기를 기다리지만 애석하게도 생리 현상은 감정 회로와도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줄기처럼 여러 갈래로 솟아나 의식을 거느리는 신경은 꿈틀거리지도 않았다. 둘은 살인과 얽힌 모든 것에 이미 익숙해져 있다. 피가 페인트처럼 흩뿌려지고 살덩어리가 너저분하게 흐트러진 광경에는 이제 토기도 느끼지 못했다. 수치스럽게도, 살인에 순결해지지 못한 것이다. 인간에 기대어 말하자면 열등하고 우승자에 비춰 말하자면 우월한 일면. 서로를 마주 보는 눈동자는 열렬하게 타오르지도, 파리하게 질려 있지도 않았다. 평행선과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뒤틀린 대상을 향해 허비할 감정이란 넉넉하지 못했다. 살인자는 살인자에게 조언한다.

 "넌 거짓말을 더 자주 쳐야 될 것 같아."

 "왜?"

 저 멀리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분명 둘과는 다른 삶의 족적을 밟아온 인간이 내는 기척이다. 안소니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카리스가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인간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면이 마모된 이상, 당장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제 얼굴과 닮은 인간은 바깥이 아닌 앞에 있었다. 모든 종에 해당하는 얘기지만 동족이 살아남을 때 자신 또한 살아남을 확률이 높았다. 안소니는 말끔한 낯으로 대답한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분명 널 죽이고 싶어 할 테니까."

 지척까지 다가온 기척의 주인은 차 안에 살인자가 탄 줄 모르는 수사관 둘이었다. 앞좌석과 뒷좌석이 막혀 있어서인지 봉지를 데롱데롱 들고 온 젊은 수사관은 뒷좌석 벌컥 문을 열었다. "생각해 보니 저희만 먹기엔 좀 찝찝해서요. 치킨 샌드위치 버거로 골랐는데 괜찮으시죠?" 카리스는 말없이 버거를 받아들였고, 안소니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용의자와 피의자에게 식량을 전달한 수사관은 뒷좌석 문을 경쾌하게 닫았다. 되도록이면 흘리고 먹지 말라는 말은 덤이었다.

 

 서에 오자마자 시작된 수사는 피의자인 카리스가 변호해 준 끝에 (물론 열렬하진 않았다.) 가출 사건으로 결론 났다. 경찰에게 지급되는 리볼버를 소지한 탓에 지저분한 분쟁으로 끌려갈 뻔했지만 고무탄은 6발이 모두 장전돼 있었다. 경찰관이 분실한 총을 우연찮게 주웠다는 변명을 번지르르하게 둘러대고, 리볼버의 원주인도 무사하다는 걸 확인한 수사관은 단순 분실 사건으로 처리했다. 그들은 안소니를 미심쩍은 얼굴로 보면서도 결국 수갑을 풀어 줬다. 연장 근무는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된 안소니는 아슬아슬하게 자정을 넘기기 전 경찰서를 등지게 됐다.

 "행선지는 정했어?"

 햇빛이 쨍쨍하게 내리비치는 캘리포니아라고 해도 밤이 되면 제법 쌀쌀했다. 적당히 찬 기운이 스민 공기가 피부를 가득 감쌌다. 머스탱 앞에서 안소니가 질문하자, 카리스는 경찰서 안에서부터 물고 있던 담배를 구둣발로 즈려밟고 새로 담배를 빼어물었다. 바람이 불지는 않아 연기가 그의 얼굴을 흐릿하게 했다. 그는 제법 긴 시간 수사라는 명목하에 수사관에게 붙잡혀 있던 게 번잡스러웠던 모양이다. 연기 너머로 보이는 얼굴에는 얕은 짜증과 피로가 한데 뒤섞여 있다. 수사관은 신문에 대문짝 만하게 났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그럴싸한 구색이 필요했던 건지, 피의자인 카리스를 붙들고 이런저런 심문을 했다. 그 심문 과정은 그가 가진 인내심을 한계까지 몰아붙이지는 않았어도, 자신이 왜 이곳에서 성실하게 선문답을 해야 되는지 정도는 자문하게 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당신들이 짐작한 대로 안소니 지간테가 저를 납치했습니다. 얼른 저 개자식을 철창 안에 밀어 넣고 저는 풀어 주기나 하세요.' 라고 하지 않은 건, 상대에게 악우로서 가지는 미운 정이라든가, 얼마 없는 양심이 옆구리를 찔러서도 아니었다. 그리 말하면 심문이 더 길어질 거라는 예상이 들어서였다. 농밀한 경험으로 축적된 예상은 다행히도 이틀이 아닌 하루만을 허비하게 했다. 수사관 앞에서부터 성가시다는 낯빛을 숨길 성의를 보이지 않던 카리스가 말했다.

 "일단 이곳은 뜰 거야."

 '이곳'을 지칭하는 다른 명칭은 캘리포니아였다. 육신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웬 신화생물의 몸뚱어리로 들어가 트렁크에 갇혀 있었다. 머무를 만한 목적이 없다면야 더는 위험 요소가 없다 해도 이곳을 속히 뜨는 게 정신건강에는 이로울 것이다. 안소니는 주머니에 한쪽 손을 집어넣어 열쇠가 손아귀에 닿는 걸 확인했다. 혹시 몰라 빼둔 민트색 머스탱의 차키였다.

 "네가 마침 가야 되는 곳이 네바다일 리는 없겠지."

 "거기까지 가서 뭘 하지? 도박?"

 "도박 겸 자선 사업?"

 기대도 안 했지만 카리스는 단번에 관심없다는 얼굴을 했다. 이렇게 된다면 곤란해지는 건 안소니 쪽이었다.

 캘리포니아에서 동쪽으로 정처없이 달린다면 접어드는 곳이 있다. 네바다였다. 네바다는 축복받은 땅이라 불리는 미국 내에서도 특출나게 버림받은 땅으로 그 입지가 독특했다. 네바다로 달린다면 보이는 거라곤 황량한 사막 지대, 물 한 트럭을 쏟아붓는다고 해도 밀 한 알 얻을 수 없는 척박한 땅에 사람을 묶어둘 만한 건 없었다. 그 지리적 이점 때문에 네바다는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캘리포니아로 가기 위해 통과하는 다리에 불과했다. 20세기 인류는 지구를 떠나 달에도 착륙했지만 원래 보금자리인 지구의 토양까지 바꿔내지는 못한 것이다. 지금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었다. 그곳은 여즉 풀 한 포대기 나지 않는 굶주린 토양을 지녔다. 그러나 전과 다른 게 있다면 지금은 그곳에서 전보다 많은 사람이 묶여 있다. 주 전체가 도박장으로 탈바꿈하면서 생긴 변화였다.

 카리스와 달리 안소니는 캘리포니아에 머물러야 될 소기의 목적이 있었다. 아직은 유예 기간이고, 계약은 파기되지 않았다. 이곳을 영영 뜰 수는 없었다. 그전에 밟아야 될 확인 절차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네바다로 가야만 했다. 차는 1대, 행선지는 두 곳. 이러면 일찌감치 도적배 짓이 필요했다.

 "네 민트색 머스탱은 내 차야."

 담배를 물고 있던 카리스는 입가를 비식거리지도 않았다. 별 웃기지도 않은 소리를 들었다는 반응이다.

 "네가 날건달인 건 알았는데 뒤로 몇 걸음만 걸어가면 바로 경찰서야. 수갑 차는 게 적성에 좀 맞아 보이긴 했지만."

 "잠깐 너로 있었던 애가 나를 짐꾼으로 부리는 대가로 이 머스탱을 넘겨준다고 했거든."

 "차 실소유주는 나고 구두 계약은 법정에서 아무 효력도 없어. 민중의 곰팡이 짓이라도 몇 년 했으면 알 텐데."

 "그럼 머스탱은 됐고 네바다까지만 데려다 줘."

 협상의 세 번째 자세, 일단 큰 것을 요구하고 그 다음에는 작은 것을 요구하라. 직장에 들어가자 선물로 받은 책을 바로 펼쳐보니 커다란 글씨로 저게 쓰여 있었다. 그 뒤로 다시는 펼쳐보지 않아 다른 자세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카리스는 어디로 봐도 예의 바르지 않은 눈초리로 안소니를 훑어봤다.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데."

 하여튼 쉽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민트색 머스탱은 텍사스를 거쳐 네바다로 가게 됐다. 안소니가 카리스에게서 머스탱을 사기로 결정한 것이다. 물론 매물로 나오는 값보다는 쌌다. 엔진 꼴을 보니 곧 퍼진다, 좌석 시트에 묻은 피 니가 지울 거냐, 그럴 거면 그냥 안 팔고 만다. 온갖 시시비를 첨예하게 다퉈 이뤄낸 합의였다. 물론 싼 값에 산 만큼 감수해야 될 게 있었다. 텍사스까지 운전석에는 안소니만 앉는 조건으로 며칠간의 동행이 결정됐다. 예정에 없던 로드 트립이다. 다만 로드 트립이라고 하기에는 자잘한 흠집이 나 있었다. 캘리포니아에서 텍사스, 그것도 휴스턴까지는 교통 체증이 없을 경우에 대략 40시간이 소요된다. 자그마치 1400마일을 넘게 달리는 여행길이다.

 첫날은 대책없이 달려서 마땅한 모텔을 찾지 못했다. 24시 다이너에 딸린 공용 주차장에다 차를 대고 쪽잠을 잤다. 너덧 시간은 더 달린 뒤에야 도시 변두리 지역에서 노란 간판을 내달은 모텔로 가 하룻밤 묵기로 했다. 시설은 물론 형편없었다. 둘은 이른 새벽에 도착해서는 각자 다른 객실 키를 쥐고 들어가 다음 날 아침에야 이 모텔에 대한 경외감 섞인 감상을 주고받았다. 벽면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튄 흔적이 남아 있고, 쓰레기통에는 다 쓴 콘돔과 주사기가 버려져 있었다. 이불 아래 시트에는 금색의 긴 머리칼이 있었다. 그리고 둘은 객실을 청소해 주는 관리인이 머리가 희끗한 70대 노인이라는 걸 알았다. 모텔에서 제공하는 조식도 만족스럽지는 못했다. 주스는 밍밍했고, 빵은 퍽퍽한 게 장례식 치를 날이 며칠 안 남은 게 확실했다. 이런 곳은 길게 머무를 곳으로 적합하지 못했다. 피로만 해소한 뒤에 바로 모텔을 뜰 계획을 세웠지만 예상치 못하게 계획에 차질이 빚어졌다. 간밤에 세워둔 머스탱의 한쪽 타이어가 터졌기 때문이다.

 둘이 모텔에 온 날은 마침 일요일이고, 일요일은 주말이다. 원칙상 주말은 노동자에게 보장되는 휴식이다. 그 어떤 노동자도 빠릿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별수 없이 하루 동안은 이 모텔에서 머물러야 했다. 일요일은 칙칙하게 허비하는 것 외엔 다른 방도가 없던 것이다.

 모텔은 캘리포니아 출신이라는 걸 티 내고 싶은 건지 외벽이 노란색으로 페인트칠돼 있었다. 다만 처음에는 화사해 보였을 칠도 바래지다 보니 으스스한 위용을 냈다. 모텔 앞에 선 공용 수영장 안에는 물 대신 먼지로만 채워져 있었다. 그곳에서 쓸모 있어 보이는 거라곤 수영장 주변에 버려진 썬배드였다. 대량으로 싼값에 사들인 건지 썬배드는 수영장 주변 뿐만 아니라 모텔 1층 야외 복도에도 듬성듬성 서 있었다. 스프링이 고장 난 것까지는 상관없었으나 거기서 망측한 연인과 주정뱅이의 흔적을 마주해야 됐던 둘은 그 썬배드로 피신했다. 썬배드는 삐뚤빼뚤한 낙서가 그려져 있었지만 상태가 양호한 축에 속했다. 태양은 구름에 가려져 흐릿했고 칸막이로 그늘이 져 있어서 살갗이 따가워지진 않았다.

 모텔에는 집 없는 사람들이 장기 투숙을 하는 것 같았다. 하루이틀 보고 친해지지는 않은 걸로 추정되는 아이들이 나와 공용 주차장에서 뛰어놀았다. 보살필 아이가 있는 어른들은 모두 어디론가 떠난 낮, 회색빛 아스팔트 위로 쭈끌쭈글해진 축구공이 쉴 새 없이 나돌아다녔다.

 "쟤네가 터트렸을까?"

 자판기에서 뽑은 콜라 캔을 든 채로 안소니가 물었다. 그 앞에 앉아서 누가 읽다가 버린 신문지를 주워 읽던 카리스가 아이들을 힐금했다.

 "옷 벗은 지 2년이 돼 가는데 직업병은 못고쳤나 보네."

 "못고친 병을 여기저기 요긴하게 써먹고 있거든."

 "일단 쟤네들은 아니야. 타이어를 터트렸다면 새벽에 터트렸을 텐데, 쟤네는 이른 아침부터 나와서 놀았어."

 "아하."

 안소니는 가볍게 탄성을 내지른다. 캔을 따려는 듯이 손가락을 캔 이음새 부근에 걸쳤다.

 "너도 네 고질병은 못고쳤나 보네."

 그리고 캔을 따자마자 안에 들어 있던 콜라가 흘러넘쳤다. 손바닥을 적신 검은 물은 테이블까지 떨어졌다. 안소니는 부산을 떠는 대신 부글거리며 끓는 액체가 멎을 때까지 기다렸다. 카리스는 탄산이 부글거리는 걸 보다가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다시 시선을 제자리에 뒀다.

 "너만 요긴하게 써먹는 게 아니니까."

 그때 축구공이 둘 앞으로 굴러떨어졌다. 안소니보다는 카리스 발치에 더 가까운 곳이었다. 공을 가지러 오기에는 먼 위치여서 그런지 저 멀리서 아이들은 둘을 바라보기만 했다. 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아이도 달려오려다 만듯 엉거주춤 서 있었다. 안소니는 카리스에게 시선을 줬다. 카리스는 귀찮다는 듯이 보면서도 일어섰다. 신문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아이들에게 공을 차 줬다. 공은 멀리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아이들이 다 같이 정신없이 공을 향해 뛰어갔다.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배은망덕한 아이들은 또다시 공을 차면서 놀기 시작했다. 그런 말도 서투를 나이기는 했다. 카리스는 다시 자리에 앉아서 신문을 읽었고 안소니는 아이들을 구경하다가 손에 묻은 액체가 끈적거릴 때쯤에야 일어섰다. 문득 지금이 아주 웃기다는 걸 수돗물에 손이 깨끗해질 때쯤에야 알아차렸다.

 

 타이어를 바꾸고 난 뒤, 텍사스까지 가기 전에 재정비해야 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를테면 식량.

 가는 중간중간 내려서 배를 채운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혹시 모를 불상사는 미연에 대비해야만 했다. 광활한 몸집을 자랑하는 미 본토에서는 주와 주를 관통하는 로드 트립을 하던 중에 조난되는 사람이 나오기도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아사는 체질에 맞지 않았다. 국도를 막힘 없이 내달리기 위해서는 미리 트렁크나, 뒷좌석 시트에 구비해야 될 게 있었다.

 모텔 주변에는 식자재 마켓이 위치했다. 자본주의의 정점인 곳답게 마트에는 없는 게 없었다. 

 안소니는 두 팔을 굽혀서 상단부에 기댄 채로 카트를 끌었고, 카리스는 진열대 위에 올라간 것 중에 먹음직스러운 걸 카트 안에다 던졌다. 이른 시기부터 바깥을 나돌기 시작한 안소니는 가리는 게 없었지만, 카리스는 입맛이 까다로운 축에 속했다. 보통 입맛이라는 건 무던한 이가 까다로운 이에게 맞추는 법이었다. 안소니도 듬성듬성 입맛에 맞는 걸 고르기는 했지만, 주로 나서서 뭔가를 고른다기보단 카트 안에 나동그라진 식료품을 감별하는 노릇이나 했다. 포장지 뒷면에 희미하게 적힌 유통기한을 확인한다든가, 카리스가 고른 와인을 괜히 품평한다든가. (A : 난 소비뇽보단 소노마가 더 좋은데. C : 누가 이거 네 거래?) 그 외에 설전을 벌인 건 기껏해야 러플스 감자칩을 두고 어니언이 낫냐 사워크림이 낫냐는데, 그 유치한 설전은 카트 안에다 감자칩 두 봉지를 넣는 걸로 마무리가 됐다.

 계산을 마친 뒤 상자 안에다가 식료품을 다 밀어 넣고 카트에다 실었다. 안소니는 캐셔에게 주변 주유소 위치를 묻느라 자연스레 카트는 카리스의 몫으로 떨어졌다. 카리스는 무료한 듯 서 있다가 구태여 그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고는 먼저 카트를 끌고 문밖을 나섰다. 대충 식료품 마켓 근방에 주유소만 두 개가 있고, 그 주위에 유명한 도넛집까지 있다는 걸 들은 안소니가 뒤를 돌아봤을 때 카리스는 머스탱 앞에 서 있었다. 뒷좌석 문을 열고는 거기다가 상자를 밀어 넣고 있었다. 일상적이라면 일상적인 풍경이지만 지난 연대기를 상기하자면 그건 굉장히 해괴망측했다.

 

 

 

 

 마켓에서 산 식료품 한 상자를 싣고, 주유소로 가 얻은 경유 통까지 트렁크에다 실었다. 도넛집에 가지는 않고 그 옆에 있는 서브웨이에 가서 샌드위치 하나씩은 입에 물고 머스탱에 올라탔다. 정오를 넘긴 애매한 시간대였다. 여행지도 밀집 지역도 아닌 한적한 외곽 도로를 달리니 중간에 머스탱이 정체되는 구간은 없었다. 신호 때문에 머스탱이 멈춰 섰을 때쯤에 정적이 깨졌다.

 "네 주머니에 담뱃갑 있어."

 그리고 안소니는 맡겨놓았다는 듯이 카리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리스는 별말없이 담뱃갑을 열어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바로 안소니 손에 올려 주지는 않고 대신 귓가에 끼워 줬다. 안소니는 그 손가락을 흘겨보다가 헛손이 된 손으로 카리스가 쥐고 있는 담뱃갑을 꽉 쥐였다. 손아귀에 연약한 담배가 다 부서져 내장을 보여 주기 전에 금방 놓아줬다. 둘은 나흘보다는 길고 닷새보다는 모자란 시간 동안 같은 차를 타기로 했다. 그럼 이 담뱃갑은 머스탱 안에 있는 인질과 다름없다. 보이는 거라곤 황무지밖에 없는 도로가 10마일이나 펼쳐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인 곳에서 담배는 훌륭한 인질이다. 인질을 다 축내기 전에 도착하거나, 휴게소를 발견하길 고대하는 게 둘에겐 중요했다.

 차가 달리는 내내 둘 사이를 채운 건 대화가 아닌 라디오 소리였다. 기상 상황, 정치 선전, 연예계 가십을 말하는 여자의 목소리에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는 전무했다. 돋보기를 대고 찾아본다면 대화 주제라고 할 만한 걸 발견할 수도 있다. 단지 둘 다 침묵을 불편해하는 쪽은 아니었을 뿐더러, 오히려 그 침묵에서 안정감을 찾는 쪽에 가까웠다. 둘이 간간히 하는 대화는 음식으로 비유하자면 1달러도 채 안 되는 감자칩 같은 대화가 주였다. 입이 심심하다면 꺼내 먹지만 안 먹는다고 해서 죽지는 않는 간식거리 수준에 불과한 대화. 영양분을 채우기엔 턱없이 모자라도 지루한 걸 달래는 건 가능했다.

 머스탱은 넓게 펼쳐진 해안선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펼쳐진 도로를 달렸다.

 "거기 지도 좀 봐줘."

 안소니가 핸들에 한 손만 걸친 채로 말하면 카리스는 지도를 펼쳐 봤다. 지도와 표지판을 한 차례 번갈아 보더니 무감하게 조언한다.

 "네가 지금 달리고 있는대로 쭉 달린다면 우리는 절벽행이야."

 안소니는 별내색없이 기어를 올렸다. 바로 핸들을 꺾어 차선을 바꾸고 직전까지 내달렸던 도로를 다시 밟았다. 엔진이 굉음을 내며 도로를 찍어눌렀다. "그걸 왜 지금 말해?" 정말이지 시시콜콜한 대화였다. "네가 지도를 봐 달라고 안 했으니까. 애초에 표지판만 제대로 봤어도 여긴 안 왔어."

 깎아지른 산등성이 같은 절벽 위에 둘러진 도로는 거침없이 내달리기엔 아슬아슬한 구조였다. 해안선을 따라 곡선으로 만들어진 도로여서 운전할 때 심장을 조이게 하기 충분했다. 그러나 둘 다 그런 걸로 스릴감을 갖기엔 이미 이런 길을 수없이 지나쳐 왔다. 조금만 삐끗한다면 나동그라질 게 분명한 인생의 선로 위에서.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 지켜야 될 게 있어." 엑셀을 꽉 누르자 엔진이 요란하게 울렸다. 타이어가 도로를 찢어 발기는 듯한 소음이다. "하나는 열심히 차창 너머나 보면서 여기가 맞는 길인지 감시하는 거고." 머스탱은 아슬아슬하게 가드레일 바로 앞에서 급정거했다. 뒤에 실려 있던 식료품 상자가 바닥으로 넘어졌다. "다른 하나는 차가 절벽 바깥으로 안 나동그라지게 조심하는 거야." 둘 다 머리를 박지는 않았지만 상체가 앞으로 쏠렸다. 벨트를 매지 않았다면 불상사가 생겼을 수도 있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바다는 선명한 푸른빛, 그리고 푸른빛은 삶과 죽음을 동시에 상징한다. 카리스는 고민한다. 지금이라도 차를 갈취하고 운전석을 강탈해야 되는지. 작금의 난동에선 합리적인 의문이지만 그전에 상대가 선수를 쳤다.

 "동반자살은 한물갔지."

 안소니는 핸들을 다시 잡는 성의는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쏠린 상체를 뒤로 물리지 않은 채 핸들에다가 두 팔을 구부려 기댔다. 엔진을 조금만 밟는다면 범퍼는 무식하게 가드레일을 들이박을 것이다. 딱 그만한 간격을 두고 머스탱은 바다와 대치하고 있었다. 목숨을 아낀다면 하지 않을 불량스러운 태도였다. 

 "무엇보다 손가락이 퉁퉁 부어서 죽는 건 별로고."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다고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표출된다. 기실 인간적이라는 표현은 비난으로든, 혹은 숭배의 목적으로든 사용된다. 양다리를 걸친 것이다. 인간은 인간을 못내 사랑하면서도 멸시한다. 그들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단어란 딱 지금까지 태어나고 죽은 인간의 수만큼이나 다채롭다. 그러나 카리스는 인간적이란 표현과는 대체로 동떨어진 인간이다.

 그는 직전, 운전석에 앉은 이가 자살 드라이브와 비스름한 행각을 벌인 와중에도 표정에 균열이 일지 않았다. 인간에게 가장 귀중한 건 대부분 목숨이며, 그 목숨이 위태로워지면 누구나 가장자리 안에 숨겨진 치부의 감정을 내비쳤다. 장난으로든 위협으로든, 제 생명줄을 바닷물에 담글 뻔한 이에게 그는 그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목숨을 헐값으로 쳐서? 안소니는 제 앞에 놓인 평온한 낯을 보고 한눈에 알아차렸다. 그게 아니었다. 이건 고작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죽지는 않으리라는 걸 아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다. 정말이지 버릇없고….

 "가드레일 한 번 들이박는다고 절벽 밖으로 떨어지지는 않아."

 느릿느릿 이어지는 목소리에는 여타 사람이라면 실을 감정이란 게 섞여 있지 않았다. 그는 간혹 가감 없이 비인간적이게 굴 때가 있었는데 가령 지금 같은 경우였다.

 "여기 박혀 있는 골조가 생각보다 튼튼하거든. 부수려면 픽업트럭 정도는 끌고 와 줘야 해 볼 만해. 머스탱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는 거야."

 "들이박아 본 것처럼 말한다?"

 "들이박아서라도 차를 멈춰야 될 때가 있으니까."

 "운전 실력이 형편없나 보네. 앞으로 너랑 차를 차야 될 때는 내가 운전석에 타야겠어."​

 "네가 집요정 짓이나 하고 싶다면야 나야 말릴 생각은 없지만. 지금 뒤에서 들이박기 딱 좋아 보이는데."

 "좀 쉴 때 됐잖아. 여긴 외진 곳이라 5분 쉰다고 해도 뒷범퍼 찌그러질 일은 없을걸."

 짭짤하게 소금기 섞인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바다가 있는 곳에서 유독 포악했다. 절벽을 집어삼킬 듯이 쉴 새 없이 파도가 절벽을 몰아붙였다. 귓가로 파도 소리가 가득 밀려왔다. 바다에 빠진 사람의 구멍에 물이 밀려오듯, 그리고 귀와 코가 물에 잠긴다면 그 다음 속수무책으로 열리는 건 입이었다. 그닥 절박하진 못한 얼굴로 안소니가 입을 열었다.

 "시간을 돌리고 싶었어?"

 후회하는 인간이 가장 먼저 짓씹는 건 시간이다. 약간의 시차는 있었지만 둘은 같은 질문을 받았다. 카리스는 안소니를 들여다봤다. 짤막하게 대답했다.

 "기회를 줬으니까."

 질문과 대답 사이에 간격이랄 건 없었다. 고민이 필요한 질문은 아니란 소리였다. 같은 질문을 받고 다른 대답을 내놓은 걸 확인한 안소니는 핸들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파도는 여전히 갈비뼈보다 아래에 위치한 절벽을 철썩이고 있었다.

 "어느 시점으로?"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건 아닌데 그때는 아니야. 그때보다는 좀 더 전이지."

 헝거게임이 끝나고, 역사가 지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마법이 사라졌다. 마법사에게 마법이란 실체 일부와 비견된다. 마법 사회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마법사는 영문도 모르고 마법을 잃었다. 공평하게 불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소수의 마법사는 마법을 잃은 이유를 확신하지는 못해도, 추측은 할 수 있다. 세상사가 모두 인과대로 굴러가지는 않지만 사건은 다른 사건을 일어나게 하는 주축대 노릇을 했다. 추측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은 소수의 마법사는 뜻밖에도 우연한 기회로 이 머스탱에 같이 타게 됐다. 안소니는 그 추측을 입밖에 담을 만큼은 담대했다.

 "헝거게임이 끝난 뒤에 마법이 사라졌지." 고리타분한 뒷배경. "대부분은 왜 마법이 사라졌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아니잖아." '우리'라는 우스꽝스러운 표현. "마법의 원천이 살인이나 폭력, 혹은 그에 준하는 광기라면." 여기서부터는 추측. "어쩔 수 없는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마법을 다시 되찾자……. 는 생각을 하는 쪽이 있더라고." 미치광이의 사고방식.

 얘기를 전해 들은 카리스는 담담했다. 그다지 놀랍지는 않은 듯했다. 마법이 사라지자마자 머리 어느 한편에 뒀을 법한 원인과 추측이기는 했다. 그 추측이 결론으로까지는 이어졌을지 몰라도 그는 합당한 실마리를 쥐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확인해 봤대?"

 그 질문에 안소니는 심드렁히 한쪽 손목을 꺾고 이리저리 돌렸다.

 "일단 폭력은 아니야. 내가 그 말한 새끼를 좀 패 봤거든."

 "그 추측이 사실이라면 그걸로는 모자라다는 말이네."

 제 손목을 보고 있던 잿빛 눈동자가 들려졌다. 눈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둘 다 격렬한 구석 없이 평이하다.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만큼 간발의 침묵, 그 뒤에 따라붙은 수긍.

 "맞아."

 둘은 잠시 전능했다. 물론 이 시점에선 옛이야기였다.

 역사는 수십 명에 의해 뒤바뀌었고, 그건 시간을 되돌린 것과 같은 힘이었다. 사회는 그 어떤 우승자와 조공인도 기억하지 못했다. 무지가 가져다준 대가는 예상보다 컸다. 인간이 아닌 신의 영역을 넘본 죗값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한 번이 가능하다면 두 번도 가능했다. 제 손으로 일궈낸 역사를 다시 뒤틀리게 할 수도 있다. 역성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번에는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5분 지났나?"

 안소니가 물었다. 누구나 할 만한 물음이다. 카리스는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나 할 만한 주억거림이다.

 머스탱은 뒤로 후진하는가 싶더니, 방향을 틀었다. 다시 느지막하게 출발했다.

 

 

 

 샌프란시스코를 벗어나 휴스턴으로 가기 위해서는 캘리포니아 남단, 로스엔젤레스를 거쳐야만 했다. 로스앤젤레스는 미국에서 손꼽히게 번영하는 도시답게, 교통 체증으로는 악명이 자자했다. 교외로 접어드는 고속도로를 타도 정체 구간을 마주해야 되는 건 변함이 없었다.

 계기판 바늘은 시속 30킬로미터 아래에서 요지부동이고, 도로를 빼곡하게 채운 자동차는 멀미를 자아냈다. 도로 양쪽으로 가득 늘어선 야자수 실루엣과 저 너머로 보이는 스카이라인만이 염증이라도 인듯 권태로운 심기를 달래 줬다. 층과 층의 흐릿하게 섞인 하늘은 픽업트럭에서 파는 아이스크림 색깔 같았다. 바람을 불면 공기 중으로 흩어진 솜사탕처럼 오묘한 빛깔이다. 이곳에서 머무르면서 같은 하늘이란 표현이 얼마나 무용한지 실감했다. 몸체가 같다고 해도 색깔이 이렇게나 다르면 다른 하늘이라고 해도 옳았다. 캘리포니아의 하늘은 다른 곳보다도 더 천진했다. 여러 갈래로 갈라진 위성 도시로 차들이 각자 흩어질 때쯤에야 바늘이 위로 올라갔다. 주저없이 머스탱이 나아가기 시작한 건 그쯤이다.

 일자로 쭉 뻗은 고속도로를 달린다면 핸들을 고집스레 붙들 필요가 없었다. 안소니는 핸들에 오른손만 걸린 채로 감궂게 가속 페달을 밟기만 했다. 미풍은 뺨을 간지럽게 쓰다듬는 것처럼 불어왔다. 일광이 지나칠 때쯤에는 구름이 손 그늘처럼 가려 줬다.

 머스탱이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카리스는 대체로 침묵을 지켰다. 창에다가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는 게 대부분이었고, 간간히 간식거리라고 할 만한 걸 꺼내서 먹었다. 운전자 입에 간식거리를 물려 줄 만큼 친절하진 못해서 기껏해야 땅콩 같은 걸 입에 던져 줬다. 안소니는 한 번은 입 벌려서 먹는 걸 성공했고, 그 다음에는 보기 좋게 실패했다. 바닥에 더 땅콩이 떨어진다면 치우는 게 제 몫이라는 요령 좋게 깨달은 뒤에는 자기가 직접 봉지를 뜯어서 먹는 걸 택했다. 그 외에 소란스러운 일은 없었다. 둘은 과묵하지는 않았지만 수다스럽지도 못했다. 조용한 여행길이다. 머스탱은 몇 시간이고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를 달려 한산한 구간으로 접어들었다.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위성 도시를 너덧 개쯤 지나치자 어느샌가 양옆으로 펼쳐진 건 야자수가 아닌 선인장이다. 도로 위를 달리는 것도 머스탱밖에 없었다. 캘리포니아를 벗어났다는 표지판과 다름없다. 대략 10마일쯤 핸들 돌릴 일이 없다면 전방주시의 의무의 내다 버리는 것도 손쉬웠다.

 안소니는 오랜 시간 운전해서 뻐근한 등허리를 피고 쪽잠을 자려는 것처럼 상체를 웅크렸다. 태평하게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 이유는 없었다. 순전히 그냥 그러고 싶었다. 조수석에 앉은 카리스는 등받이에 뒷머리를 누른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옆선 너머로 드넓은 지평선 아래 석양이 지는 게 보였다. 차창 너머로 흘러오는 바람 때문에 밀빛 머리칼이 잘게 흔들렸다. 저 멀리서 침범하듯 에워싸는 붉은빛 때문에 머리칼은 밝게 부서지는 것 같았다. 말썽을 부리던 라디오는 전파가 통한 건지 철 지난 유행가가 흘러나왔다. 간드러진 여자의 목소리는 잔잔한 음조에 걸맞게 흐르듯이 들려왔다. 직감이라는 게 있다. 그런 직감은 누구라도 납득 가능한 이유와 함께 찾아오는 게 아니었다. 그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들이닥쳐서는, 앞을 미리 내다본다는 허무맹랑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지금 이 순간은 왜인지 모르게 기억에 패인 자국을 만들 것 같다는….

 그때 카리스가 눈을 떴다.

 잠깐 졸기라도 했던 건지 푸른 눈에는 졸음기가 얕게 묻어나 있었다. 카리스는 목을 옆으로 느슨하게 꺾더니 시선을 돌렸다. 마침 카리스를 보고 있던 안소니와 시선이 마주쳤다. 안소니는 입꼬리를 날카롭게 말아 올렸다.

 "게으름뱅이."

 일어나자마자 날아온 질책에도 카리스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여기에 앉아서 할 수 있는 게 자는 거밖에 더 되나?"

 "잠만 잘 거면 조수석이 아니라 트렁크가 더 안락하지 않아? 여긴 빛이 잘 들잖아."

 "쩨쩨하게 굴 거라면 머스탱은 안 파는 걸로 할게. 내려."

 안소니는 못들은 척 라디오 주파수를 조정했다. 지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세 번이나 채널을 바꾸고 나서야 뉴스가 흘러나왔다.

 

 

 

 ​골드러시에 눈이 멀어 광막한 사막을 누벼야 됐던 개척자 시대와 달리 현대의 무법자는 그때보다는 진보된 환경에 놓여 있다. 일단 화폐를 지불한다면 몸 눕힐 곳과 시원한 물을 마실 수 있다. 굳이 총구를 머리에 겨누면서 으름장을 놓지 않아도 됐다. 문제란 그런 곳을 찾는 것도 일단은 도로를 무작정 달려야 된다는 점이었다.

 애리조나에서부터는 암갈색 사막이 펼쳐졌다. 몇 시간을 내달려도 꿈쩍 않는 풍경의 황야를 질주했다. 창을 열면 반겨 주는 거라고는 모래 바람이 전부였다. ​​이 부근부터는 전파가 통하지도 않아 라디오는 끄고 노래만 주구장창 틀었다. 빠르게 생산되고 빠르게 부패되는 시대의 속도에 발맞춰, 벌써 한물간 노래 취급받는 올드락이 고막을 울려댔다. 시대가 변해가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사랑을 숭배하고 젊음을 예찬하며 목청 높이 노래를 불렀다. 흘러가는 시대에 따라 모두가 몰라보게 달라지고 있다며 감탄과 시름을 번갈아대며 하지만 몇몇 가치만큼은 고루하리만치 일정하게 공유되는 것이다.

 길이 막힐 게 염려돼 부러 외진 도로를 타고 나와서인지 도로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지나가지 않았다. 문명의 흔적이라고는 머스탱이 내달리는 도로가 전부였다. 사람 손길이 타지 않은 풍경을 보고 탄복하는 것도 몇 분이지, 끝도 없는 점을 향해 계속해서 내달리다 보면 속에서 느린 신물이 올라왔다. 세상과 동떨어진 곳에 버려져 끝도 없이 달리는 것 같았다.

 태양이 등선 너머로 사라지고, 어둑해질 때쯤에야 아슬아슬하게 뉴멕시코에 도착했다. 주와 주가 갈리는 경계선 부근에서 하룻밤 묵을 곳을 찾았다. 그곳은 간판만 모텔이라고 달았지만 생김새는 차라리 민박 업소에 가까웠다. 딱 1층 높이에 불과한 난쟁이 건물은 많은 손님을 재우지는 못할 곳 같았다. 주차장이라고 부를 만한 빈터에는 차가 너덧 개만 늘어섰는데도 포화 상태였다. 구석에다 머스탱을 세우고 들어가자 카운터를 지키는 여자가 카드키를 내 줬다. 카드키를 넣는 노란 종이 케이스에는 일일이 룸 번호가 써져 있는데, 모서리랑 옆면이 닳아 있었다. 건물 내부는 지배인이 잘 관리한 듯 깨끗하기는 했지만 훌륭하다고 말하기에는 어폐가 있는 곳이었다. 각자 카드키를 꺼내고 돌아서려는데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여자가 둘을 불러 세웠다.

 "오늘은 마른 달이 뜨고, 개의 날이라고 불리는 날이죠."

 둘은 그 표현이 생소해서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머글 사이에서 통용되는 단어는 뭐가 좀 다른가? 싶을 때쯤에 여자가 둘의 얼굴을 읽어낸 뒤 설명했다.

 "여기에선 한여름에 가장 더운 때를 개의 날이라고 부르는데. 이건 오리온의 개라고 불리는 시리우스가 한낮에 해의 근처에 있어서 더워졌다고 믿었거든요. 한여름에는 초승달이 누워서 져서 마른 달이라고 부르고요."

 후덥지근한 공기와 이글거리는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지금은 여름의 중심에 서 있는 철이기는 했다. 그러고 보니 그랜드 캐니언에 가면 쏟아지는 별빛을 본다고도 했다. 일몰이 질 때쯤에 딱 수사관에게 붙들려서 보지는 못했지만. 여기는 뉴멕시코였다. 도심의 빛이 자연을 야만적이게 침범하지 않는 곳이었다. 

 "별이 가장 잘 보이는 날은 달빛이 제일 약할 때예요. 오늘은 마침 구름이 끼지 않았고, 달도 홀쭉해진 때라. 별 보기 나쁘지 않은 때일 거예요."

 

 

 

 안소니는 천문학에 월등하지는 않았어도 평균을 상회하는 성적을 받았다. 그건 천문학을 깊이 애호하지는 않아도 그를 가르치던 교수가 강의를 재치 있게 하는 인재라는 점이 컸다. 보바통에서 수 년 동안 몸 담았던 교수는 혼혈 출신으로 마법 사회와 머글 사회에 한 다리씩 걸친 마법사였다. 교수는 수업을 하는 중간중간, 교재에 적혀 있지 않은 내용에 관해서도 떠들었다. 가령 밤하늘에 얽힌 머글의 구전과 격언에 관한 얘기였다. 천문학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건 어둠 속에서도 빛으로서 존재해 길을 밝혀 주는 존재였다. 스스로 빛을 내는 붙박이별과 그 별 주변을 공전하는 행성, 태양계에 뿌리를 내린 수많은 점들.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지만 오래 전부터 귀중하게 여겨지던 별도 있다. 교수가 시리우스에 얽힌 얘기를 꺼낸 것도 더운 바람이 창 너머에서부터 불어오던 이른 밤이었다. 그는 시리우스를 설명할 때 고대 머글 학자가 적은 구절을 인용했다.​ 

 가장 밝지만 불길한 전조, 고통받는 인간에게 뜨거움과 열병을 가져오는 별.

 시리우스를 명명하는 다른 이름은 오리온의 개였다. 그 개가 여명과 함께 나타나면 태양이 지상을 위태롭게 달군다는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 못할 자연의 뜻은 길조보다는 흉조에 가까웠다. 이는 서양에만 극한된 믿음이 아니었고, 이역만리 동양에서도 엇비슷한 믿음을 공유했다. 그곳에서는 시리우스를 천랑성이라 명칭한다. 그 별을 하늘의 늑대, 약탈자라고 부른 것이다. 천랑성이 뜬다는 건 야만족이 침입해 땅 위를 어지럽게 한다는 징조로 받아들였다. 현대에 들어서 그 믿음은 희석되기는 했으나 수천 년을 거쳐온 미신은 결코 한순간에 무너지지 않았다.

 마른 달이 뜨는 개의 날. 별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점점이 사위를 밝혔다.

 둘이 침실에 들어가 바로 하루를 마무리하지 않은 건 그 때문은 아니었다. 여자가 한 권유에도 둘은 흔쾌히 밖을 나올 의향이 없었는데, 밤하늘을 바라보며 정취를 누리기에는 감수성이 말소된 감이 없지 않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은 밤하늘을 위해서는 아니라도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 바깥으로 걸음할 수는 있었다.

 안소니가 담뱃갑과 지포라이터를 들고 바깥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자리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남자가 있었다.

 안소니는 놀라는 기색없이 그 남자의 옆 빈자리에 가 앉았다. 카리스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 안소니를 바라봤지만 그뿐이다. 아는 척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마침 담배를 다 피운 건지 담배 끄트머리를 재떨이에 대충 비벼 끄고는 옆에 있던 과일 통조림을 깠다. 플라스틱 포크로 캔 안에 든 파파야 한 조각 베어물었다. 안소니는 담배를 피우면서 여자가 말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부러 밖에 나가서 보라고 할 만큼 과연 밤하늘에는 촘촘하게 별이 박혀 있었다.

 빛공해로 희뿌연 기미 없이 선명한 별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속 안에서 몰려오는 깊은 고요함을 느낄 것이다. 아름다운 걸 보면 육안으로 그걸 탐하기만 할 뿐, 감탄할 새가 없다. 그건 고국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란 점이 한 몫했다. 여러모로 파리에서 누리는 정취와는 다른 이국적인 정취로 칠해진 곳이다. 이쯤에서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아름다워?"

 카리스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고 있었지만 어둠 속에 깔린 얼굴에는 경탄이랄 빛까지는 서려 있지 않았다. 평소와 같이 덤덤하고 메말라 보이는 낯이다. 잘못 본 건 아니었던 건지 그는 곧바로 대꾸했다.

 "나쁘지 않기는 하지만."

 괄목하기에는 약간 모자라다는 듯 그는 시선을 쉽게 떼내서 옆을 돌아봤다.

 "라피에서 보는 밤하늘이 더 맑고 아름다워."

 고국에서 보던 밤하늘을 상기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이국인의 버릇이다. 안소니는 다시 밤하늘을 찬찬히 응시했다. 조밀하게 박힌 별빛은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셀 수조차 없고, 육안에 들이찬 별은 금방이라도 제 앞에 떨어질 것처럼 선명하게 빛났다. 이보다 더 맑고 아름다운 라피의 밤하늘을 상상한다.

 분명 지금보다는 더 매몰찬 바람이 불 것이다. 눈발이 흩날리고 모든 대지가 흰 눈에 뒤덮이면 어느 곳이 땅인지, 뭍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다. 별빛에 정신이 팔려 붙박이처럼 서 있으면 혈관에는 성에가 끼고 심장은 느린 속도로 죽어가기 십상이다. 그곳을 관장하는 자연은 분명 인간에게 너그럽지 못하고 냉엄하다. 그럼에도 그곳에서 처음 정착하기를 택한 사람을 덧그려 본다. 풍족하고 따스한 곳을 갈망하는 건 인간에게 내재된 본능이다. 그 냉혹한 기후를 감수하고서라도 붙들고 싶던 무언가라도 있는 걸까? 안소니는 고개를 돌려 카리스를 바라봤다. 카리스는 밤하늘에는 아예 흥미를 잃은 건지 포크로 과일 조각을 찌르고 있었다.

 손에 쥐는 게 있다면 감수해야 되는 것도 있는 법이다. 살갗을 아리게 하고 핏줄을 터지게 하는 곳에 붙박여 있기를 택했다면, 분명 그에 상응하는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게 밤하늘을 찬란하게 수놓은 별빛인지 아니면 이국인은 상상하지도 못할 무언가인지는 지금 당장 그로서는 모를 일이다. 안소니는 마저 밤하늘을 보며 모자란 감성이나 채우기로 했다. 한가롭게 뉴멕시코의 별을 보며 정취를 누리는 것도 나중에는 아득한 일이 될 테니까.

 

 

 

 

 

 안소니가 눈을 뜬 건 새벽 즈음이다.

 뉴멕시코 중심을 가로지르는 로즈웰을 지나쳐, 텍사스 해안까지 들어왔다. 죽자고 엔진만 밟다 보니 어느샌가 모텔까지는 거리가 있었다. 인가가 있기는 했지만 주변에 마땅찮은 편의시설이라고 할 만한 건 없었다. 그걸 찾기 위해서는 한 시간 정도는 더 달려야 됐지만 피로가 눈꺼풀에 들러붙었다. 핸들을 붙든 채로 졸 것 같길래 갓길에 머스탱을 세워뒀다. 잘 생각은 없었고 조금만 쉴 생각이었는데 그게 그만 길어진 것이다. 안소니는 깨어나자마자 몸을 뒤척이다가 반사적으로 옆을 돌아봤다. 옆에는 카리스가 창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계기판 옆에 띄워진 숫자는 이미 자정이 넘어섰다는 걸 가리켰다. 전조등이 비추는 불빛만이 새까만 도로를 환하게 비췄다.

 차 내부는 램프를 켜지 않아 계기판에서 희미하게 나오는 불빛 빼고는 어두웠다. 조수석 쪽 팔걸이에 담뱃갑이 꽂힌 게 윤곽선으로 보였다. 제 몫의 담배는 동난 지 오래였다. 안소니는 별생각없이 벨트를 푼 뒤 카리스에게 상체를 기울였다. 팔을 뻗어 담뱃갑을 한 손으로 쥐고선, 웃옷 안주머니에 있는 지포라이터를 빼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때 어깨가 붙들렸다.

 워낙 가까운 거리였기에 어깨에 손이 닿자마자 안소니는 시선을 들었다. 어느샌가 카리스는 깨어나 있었다. 어깨를 붙든 건 무의식 중에 벌인 짓 같았다. 이성이 무언가 판단을 내리기 전에 육체가 먼저 움직인 것이다. 그리고 어깨를 쥔 건 효과적인 제압 방식 중에 하나였다. 상대를 행동불능에 만들기 쉬운.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한 눈과 마주치자 안소니는 잊고 있던 기억을 환기한다. 아레나 위에서 눈도 편히 못붙이던 시간을, 대포 소리가 연달아서 울리고 그 위로 시체를 비춰주던 장면을.

 파문처럼 흩어지는 기억 속에서 시선이 얽혔다.

 이 머스탱은 건장한 성인 남성 두 명을 채울 수는 있어도 편히 드잡이질을 할 만큼 공간이 넉넉지는 못했다. 그건 필요 이상으로 주먹과 명치를 가깝게 했고, 악력을 실지 않았는데도 상대를 누르듯이 압박하게 만들었다. 몸을 물리기에도 요원치 못한 공간에 진득한 적의는 없었지만 섣부른 긴장은 남아 있다. 촉각이 곤두세워졌으나 그뿐이다. 이는 반작용에 불과하다. 총을 쏘면 충격이 개머리판을 통해 팔뚝까지 진동하듯, 우수한 조공인의 잔재가 남은 것이다.

 안소니는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담뱃갑을 열었다. 붙들리지 않은 쪽 손으로 담배 한 개비를 꺼내들고는 담배 말단부로 카리스의 턱을 두드렸다. 그 행동에는 언어가 담겨 있지 않았지만 무언의 종용이 들어가 있었다. 카리스는 잠자코 바라보고 있다가 입을 살짝 벌렸다. 그러자 안소니는 수순처럼 카리스에게 담배를 물려 줬다. 남은 손으로 지포라이터를 키자 둘 사이에 새파란 불이 일순간 타올랐다. 미세하게 잠겨 있던 어슴푸레한 눈은 불빛 앞에서 채도가 옅어 보였다. 지포라이터를 가까이 대자 담배 끄트머리에 불이 붙었다. 담배 끝이 타들어가는 걸 보고난 뒤에야 안소니는 지포라이터를 도로 카리스의 셔츠 안주머니에 넣어 줬다. 언젠가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깨를 붙들고 있던 손도 풀려 있었다. 안소니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카리스에게 기울어져 있던 몸을 제자리로 뒀다. 그가 심신미약자에게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친절이다.

 둘은 그러고서도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리스는 묵묵히 담배만 태우다가 새로 담배를 꺼내 들었다. 창을 내린 뒤 창턱에 팔을 걸친 채 담배를 피웠다. 안소니는 창에 머리를 기댄 채 묵묵히 눈을 감았다. 피로하다기보다는 눈을 감고 있지 않으면 비인간적인 언어를 뱉어야 될 것 같았다. 그러기가 싫었다. 조수석에서는 찬기운과 담배 냄새가 진동했다. 병마는 매번 어딘가에 앉아 있다가 불쑥 튀어나왔다. 이제는 그런 작당 짓에 일일이 부산스레 굴지 않았다.

 

 안소니가 다시 눈을 떴을 때쯤에는 귓가에 담배 한 개비가 꽂혀 있었다.

 옆을 돌아보니 조수석에는 아무도 없었다. 차창 너머로 주변을 둘러봤지만 거기에도 사람이라고 할 만한 형체는 없었다. 어느 시점에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완벽하게 혼자가 된 것이다.

 안소니는 우선 시야로만 동행인을 찾기를 시도했고, 그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곳에 없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손을 뻗어 선반부터 더듬어 봤다. 선반에는 지도와 나침반, 선글라스, 마시다 남은 페트병만 있었다. 담뱃갑의 촉감 같은 건 착각으로라도 만져지지 않았다. 안소니는 조금 신경질적이게 선반을 다시 닫았다.

 주머니에 지포라이터가 있기는 했지만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우기 전에 그가 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배려심이란 원체 부족해서, 차 안에 있는 동행인이 신경 쓰여 빨리 돌아올 인간은 아니었다. 물론 그는 주변을 배회하듯이 어슬렁거리다가도 볼 일 다 봤다 싶으면 미련을 두지 않고 돌아올 것이다. 그 믿음은 관계를 기반으로 한 허황된 신뢰라기보단, 이런 곳에서 머스탱을 버리고 혼자 독단적으로 횡단을 시도한다는 건 자살 시도라는 사실에서 파생된 믿음이다. 만에 하나 불의의 사고로 전두엽에 치명적인 손상이 가 그가 자살한다고 할지라도 고작 이런 곳에서, 이런 시기에, 이런 무모한 방식으로 하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뚜렷하게 있다. 기다린다면 그는 돌아올 것이다. 머스탱 안에만 박혀 있는 게 갑갑해서, 혹은 바닷물에다 머리를 처박고 싶어서. 그런 시시한 이유로 하여금 머스탱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겠지만.

 안소니는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신선한 공기가 폐부로 가득 들이찼다. 주변에 나무가 들어서서 그런지 들이셔지는 내음이 상쾌했다. 숨구멍이 한결 트이는 것 같았다. 지금 소지품이라고 할 만한 건 기름이 얼마 남지 않은 지포라이터, 귓가에 꽂힌 담배 한 개비가 전부였다. 이 시간에 문을 연 성실한 상점가는 없을 테니 지갑도 갖고 나오지 않았다. 안소니는 무작정 포장도로를 따라 걸었다. 역시 기다리는 건 적성에 맞지 않았다. 카리스를 찾으러 나선다기보다는 머스탱 안에만 처박혀 있기가 싫었다. 이 근방에서부터는 지도를 게으르게 보고, 동행인이 하는 말에만 의지해 핸들을 돌렸기에 까막눈에 가까웠다. 지도를 본다면 이곳에 뭐가 있을지 알겠지만 그건 일단은 미뤄두기로 했다. 행선지를 정해두고 가는 것에 슬슬 신물이 나던 참이었다. 발길 가는 대로 가다 보면 뭐라도 나올 테고, 뭐라도 나온다면 이 멀미도 까먹고 말 것이다. 그건 무작정 기다리는 것보다는 훨씬 윤택해 보였다.

 사람이 아닌 차만 다니길 염두에 둔 길에는 인도가 들어서 있지 않았다. 포장도로는 폭이 넓어 차가 달린다고 해도 치이는 불상사는 없겠지만, 도로 옆 땅바닥은 울퉁불퉁해서 그 위를 걷는다면 현대문명과는 거리가 있는 질감을 구두 밑창으로 느껴야만 했다. 좌우로는 활엽수가 가득 들어서서 모험심 넘치는 인간이 아니라면야 그곳을 뚫기에는 적당치 못했다. 안소니는 앞으로만 계속해서 걸어갔다. 걷다 보니 듬성듬성 사람이 사는 것 같은 주택이 몇 채 보였고, 상점가라고 부를 만한 곳도 보였다.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인간이라고 부를 만한 건 보이지 않았다. 거기서부터는 앞이나 뒤가 아닌 좌우라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행선지를 정해두지 않았기에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다. 문을 닫은 식료품점에는 오전 11시부터 연다는 낙천적인 표지판이 걸려 있고, 빨간 글씨로 CCTV가 달려 있다는 표시 문구가 살벌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걸 스치듯이 보면서 구경하고 난 뒤에 걸어가고, 걸어가고를 반복하다 보니.

 마침내 낭떠러지에 다다른다.

 행선지를 정해두지 않았지만 기실, 안소니는 무언가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건 의식하지 않았지만 갈림길에 서 있을 때 어디로 갈지 택하게 되는 이정표에 가까웠다. 안소니가 기거하는 곳은 파리였다. 유년기에는 수도 근방에서 머무르기는 했지만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에 바닷가는 없었다. 혈육들과 함께 바닷가에 간 적은 있어도 그곳은 어디까지나 잠시 머무르는 곳에 불과했다. 바다에 크나큰 애착이라고 할 만한 건 없었다. 병에다 따로 보관해 둘 만큼 근사한 추억이 있지도 않았다.

 다만 소금기 밴 내음과 함께 저 멀리서부터 그 무엇에도 묶여 있지 않는 바람이 불어왔다. 안소니는 무의식 중에 그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다고 해도 그건 '찾는다'는 표현에 가까운 짓이었다. 물기에 젖은 이끼가 밴 절벽은 감청색, 절벽 앞으로 탁 트인 바다는 쌀쌀맞게 느껴졌다. 해가 제대로 뜨지 않아 하늘조차도 바닷바람에 의해 푸르스름하게 젖어 있다. 안소니는 조금만 발을 헛딛는다면 추락사해 머리뼈가 으깨지고 말 부근까지 발 딛었다. 다른 날보다도 더 깊고 음울한 색조인 바다를 보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절벽 밑에는 모래사장이 얕게 펼쳐져 있다. 그 모래사장 위에 누군가가 서 있다.

 낭떠러지 아래로 밀빛 머리칼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안소니는 그가 카리스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야 이 시간에 혼자서 절벽 밑 해변가를 아슬아슬하게 걷는 이라면, 그것도 겁도 없이 밑창 아래를 해류로 적시고 있는 이라면. 그일 거라는 예감이 들어서였다. 소리를 친다면 들리겠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그저 저 아래 조막만 한 머리통을 하릴없이 주시하기만 했다.

 그와는 비슷한 길을 걷고, 똑같은 질문을 받았다. 안소니는 매번 그가 자신과 다르다고 여겼다. 그러나 다른 궤적으로 이어지는 선이라고 할지라도 어느 곡선에서는 맞물리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건 삶에 있어서 유일무이한 순간이기도 하고, 횟수를 세는 게 무용한 수준으로 여러 번이기도 하다. 필연이라는 표현과 반대되는 건 우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우연은 언젠가는 멎게 되지만 필연은 결코 멎지를 않았다. 그건 억세풀 만큼이나 질겨서 끊으려고 해도 결코 끊어지지를 않았다. 안소니는 필연이라는 단어를 혀 아래로 발음한다. 반드시 일어나고야 마는 것, 원하든 원치 않든 결국에는 맞물리고 마는 것. 그와 맞물렸던 모든 순간은 의지라기보단 무형의 인력으로만 벌어진 결과였다. 발길 닿는 대로 가 보니 눈 앞에 있는 마치 지금처럼.

 안소니는 절벽 위에 쭈구려 앉고는 담배를 떼어내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머스탱 안에서 기다린다면 한 개비로는 모자라겠지만, 절벽 위에서 기다린다면 한 개비로도 충분했다. 담배를 반절쯤 다 태우고 났을 때 카리스가 불현듯이 고개를 들었다. 낭떠러지 위에서 담배를 피우는 안소니를 알아차린 건지, 저 멀리서 뭐라 말하는 게 보였다. 안소니는 제멋대로 입모양을 해독하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손가락으로 카리스를 가리킨 뒤 제가 발 붙이고 서 있는 땅을 가리켰다. 그 다음에는 두 검지로 엑스자를 만들고는 목을 긋는 표시를 했다. 대충 지금 안 올라오면 거기서 죽든 말든 가겠다는 의사표현이다. 카리스는 그걸 알아들은 건지 만 건지 무성의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절벽 위 시야로는 닿지 않은 측면으로 걸어가 사라졌다. 기다리니 그리 긴 시간이 흐르지 않아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때쯤엔 안소니도 담배를 다 태웠다. 몸을 일으켜 세워 구두 밑창으로 담배를 밟고는 안소니가 물었다.

 "산책?"

 "여기 부근에 바다가 있길래."

 "다음부터는 그냥 버리고 갈 거야."

 "안 그래도 그럴 것 같길래 차키 뽑고 나왔어."

 "알겠어. 이제는 잘 때 입안에 넣고 잘게."

 카리스가 조금 더럽다는 듯이 바라봤다. 안소니는 농담도 못치냐는 얼굴로 보고는 손바닥을 내밀었다. 카리스는 순순히 그 손바닥 위에 차키를 얹어 줬다. 머스탱 차키는 그 흔한 열쇠고리도 걸려 있지 않아 잃어버리기 쉬워 보였다. 다음에는 휴게소에서 열쇠고리라도 하나 사야겠다는 바람을 갖고 안소니가 일어섰다. 먼저 걸어가는 카리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가면서 자잘한 사고가 났다. 조금 낡은 지도를 가져왔던 건지 길이 지도에 표기된 길과 다르다든가, 중간에 공사 때문에 도로가 막혀 있다든가. 근방 100마일 동안은 아무 음식점이 없기도 했다. 끔찍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도로를 달리다가 그 풍경에 질릴 때쯤에야 멈춰서 쉬고 다시 달리기를 반복했다.

 철골로만 이루어져 인간의 사사로운 욕심이 입력한 대로 움직이는 기계 육신과 달리, 인골로만 이루어진 인간은 본연의 목적에 따라 성실하게 움직이다가도 한계치 이상으로 지루해지면 잘만 달리던 차를 호밀밭에다 들이박고 싶어지는 충동을 느꼈다. 정말 호밀밭에다 범퍼를 박기 직전, 머스탱을 멈춰 세웠다. 늦은 밤 내달리는 차가 없는 국도 주변으로 펼쳐진 건 음산하게 어둠에 매몰된 호밀밭 뿐이다. 사람이 아닌 식물에게 인위적인 조명이란 필요치 않은지, 그 흔한 가로등도 걸려 있지 않았다. 사체 하나쯤 묻는다고 해도 몇 년 동안은 들킬 일 없어 보이는 광경이다. 머스탱의 시동이 멎자 카리스는 뒤로 팔을 뻗어 와인 두 병의 목을 낚아챘다. 병 하나를 안소니에게 건네 줬다. 안소니는 라벨을 읽지 않았지만 그 위로 쓰인 게 뭐인지는 알았다. 소비뇽이다. 사양 않고 병을 받아 든 안소니는 병목을 쥐고 작게 흔들어 봤다. 안에서 출렁이는 액체는 하루를 끝장내기에 적당해 보였다. 카리스가 병목을 손가락으로 치고 있을 때 안소니가 물었다.

 "내가 착각한 게 아니라면 마트에서 오프너는 안 샀던 것 같은데."

 "살 필요가 없으니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안소니는 입고 있던 재킷을 벗었다. 병 밑둥을 무성의하게 재킷으로 감쌌다. 오프너가 없다면 민간요법이라도 써야 했다. 병 밑동을 핸들에다 몇 번 처박자 압력에 눌려 마개가 튀어나왔다. 그와 상반되게 카리스는 지포라이터를 켰다. 어둠 속에서 새파란 불이 튀는 걸 본 안소니가 물었다.

 "화염병 만들려고?"

 "저번부터 느낀 거지만 넌 너무 폭력적이야."

 "화염병을 만들려면 식용유도 샀어야 됐다는 말을 해주려고 했지."

 "마개 따는 방법이 그것만 있는 건 아니고, 난 그것보다 더 편한 방법을 알고 있어."

 카리스는 병에 붙은 포일을 제거한 후에 라이터를 가까이 댔다. 병목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라이터로 가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코르크 마개가 서서히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마개가 튀어나오기 직전 카리스가 재빠르게 라이터를 껐다.

 "쉽네."

 "맞아. 그리고 까딱하면 이 마개가 유리창을 깨부술 수도 있지."

 "이게 며칠 뒤에 네 차가 아니라고 해서 너무 막 다루는 것 같은데."

 "그게 중요한가?"

 코르크 마개를 선반 위에 올려둔 카리스가 병목을 쥐고 바깥으로 나섰다. 머스탱 안에서 미적거릴 사유는 없었기 때문에 안소니도 문을 열어젖히고 나왔다. 드넓은 호밀밭은 일광이 드리울 때 왔다면 나름대로 술맛을 돋게 하는 풍경이겠지만 지금처럼 사방이 어둠에 젖은 이상, 슬래셔 물을 찍기 적당한 주무대로만 보였다. 옆에 있는 게 그와 같은 살인자라는 이유도 호밀밭을 더 음산하게 한 연유 중에 하나였다.

 이곳부터는 전파가 아슬아슬하다는 표시가 있어 이 구간에 접어든 이후로는 줄곧 라디오를 껐다. 괜히 노이즈 낀 목소리를 들으면 재수가 없을 것 같았다. 머스탱 문을 나서기 직전 사운드 볼륨을 최대로 올려놓고 나오니 바깥에서도 노래가 흘러나왔다.

 둘은 그 노래를 들으면서 병목을 쥐고 와인을 마셨다. 와인은 뜸 들이 듯이 마셔야 된다는 속설이 있다지만 현상황에서는 그리 중요하게 고려할 사항은 아닌지라, 병 안에서 출렁이는 액체는 금세 동이 나고 말았다. 카리스는 바로 뒷좌석 문을 열어 새 병을 쥐였지만 안소니는 깔끔하게 그쯤에서 멈추기로 했다. 괜히 운전하다가 머스탱을 자빠트리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카리스는 굳이 권유하지 않고 병목을 쥔 채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는 원체 취하지 않는 체질인지, 와인 한 병을 빠른 속도로 비웠음에도 불구하고 휘청이는 기미 하나 없었다. 그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헤드라이트 앞. 유달리 환한 빛이 어둠을 침범하는 국도 위였다. 안소니는 그 헤드라이트로 따라가지는 않았지만 빛과 어둠이 맞물리는 직전인 지점에 섰다. 감미로운 목소리는 귓가로 은은하게 흘러들어왔고, 어둠 속에서 빛이 늘어진 곳에 서 있는 남자를 보니 떠오르는 게 있다.

 "무도회 때 생각나네."

 카리스는 야트막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빛 때문인지 평소에도 희어 보이는 얼굴이 더 새하얘 보였다.

 "시체 하나 묻기 딱 좋아 보이는 이 으스스한 곳에서?"​

 "난 거기 샹들리에가 번쩍번쩍한 곳 아래가 아니라 발코니 뒤편에 가 있었거든."

 "그런 거라면 나도 하나는 있지. 인형 같이 생긴 여자애였는데 벨기에 출신이었나, 프랑스 출신이었나…."

 "생각나는 얼굴이 몇 있긴 한데 그만할까? 다리 건너 엮인 거 알면 너도 기분 더럽잖아."

 "내 기분을 그렇게 신경 썼다면 애초에 그 말을 안 했겠지."

 카리스가 새로이 병목에다 라이터를 댄 걸 본 안소니는 무심결에 연상한다. 일보 1면을 장식했던 화재 사건을. 그리고 그는 의식적으로 생각을 차단하는 데 있어서는 귀재였다. 장난을 치기에 적당한 시점인 것이다. 안소니는 빛무리로 걸어들어가 카리스 앞에 섰다. 제 몫으로 가지고 있던 지포라이터를 카리스의 왼쪽 가슴 주머니에 밀어넣어 줬다. 주머니에는 아슬아슬하게 지포라이터 두 개 정도는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리스는 뭐 하냐는 듯한 시선으로 안소니를 멀뚱멀뚱 바라봤다. 안소니는 검지로 주머니 아래 얕게 튀어나온 지포라이터를 눌러 줬다.

 "지포라이터를 여기에다 끼워넣으면 살 확률이 올라간대."​

 "네가 굳이 끼워넣어 주지 않더라도 난 매번 여기에 넣고 다녀."

 "넌 총을 한 방만 얻어맞을 것 같진 않길래."

 "이거 지금 저주하는 건가?"

 "목숨 두 개는 항상 여분으로 들고 다니라는 거지."

 휴스턴까지 남은 거리는 시간으로 환산한다면 대략 반나절이다. 아무리 늦장을 부린다고 한들 하루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건 둘 사이에 남은 수명이 대략 하루라는 의미였다. 안소니는 하루 뒤에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악우에게 목숨 하나 정도는 여분으로 챙겨 줄 수 있었다. 평균치에 미달하는 감수성을 지닌 사람일지라도 자고로 동족을 죽는 걸 기꺼워하지 않았다. 그는 아슬아슬하게 감수성이 말살되지는 않았다. 간절하진 못하더라도 결국에는 확고하게, 그가 카리스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건 당연했다. 카리스는 분명 그를 이루는 조각까진 못돼더라도 그를 이루는 조각 중에 하나를 증언해 주는 사람이니까.

 

 

 샌프란시스코의 공기와 휴스턴의 공기는 확연하게 밀도부터 차이가 났다. 작열하듯이 내리쬐는 일광과 후덥지근한 열기는 대륙의 절반을 머스탱으로 건너왔다는 자각에 들게 했다. 도심 곳곳에 세워진 마천루는 태양 아래 근사한 빛을 내뿜었다. 인구 밀집 도시답게 중심으로 들어서자 주변에는 사람이 바글거렸다. 그러나 그런 감상을 지난하게 가질 이유는 없었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갈 거냐는 물음은 필요하지 않았다. 둘은 경유지는 같았지만 행선지는 같지 못했다.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작별에 미적거릴 이유는 없었다. 이전과 다른 게 있다면 다음을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마법사가 아닌 머글로 살아간다는 건 불편함을 동반한다. 머글 세계에선 집집마다 수신선 달린 전화기나, 우편으로 관계를 유지한다. 연락 수단에 있어서 마법사가 머글보다 더 진보적이진 않다. 그러나 마법사는 벽난로에 플루 가루를 뿌리고, 지팡이를 휘둘러 텔레포트로 이동한다. 10마일을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라고는 눈꺼풀 찡긋이는 시간에 불과하다. 머글은 그보다 1시간이 더 소요된다. 머글로 퇴화한 마법사는 이제 시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연락처를 남긴다거나 주소지를 적어 줄 수도 있지만, 이곳은 핀란드에서 건너오려면 대서양까지 건너야 되는 미국이다. 태양이 타오를 듯이 내리쬐는 이곳과는 공기부터가 맞지 않은 것 같은 남자가 여기까지 당도한 건 분명 그만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사연 있는 남자에게 그런 걸 묻는 건 쓸모없는 짓일 뿐더러, 상대나 자신이나 적어 준다고 한들 정착하지 못한 인간의 말로가 그러하듯 몇 달 가지 않아 단명할 게 뻔했다. 

 사실 이건 겉면이고, 따로 속면에 해당되는 이유가 있다.

 이 원형의 세상에서는 이제 서로를 묶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이제 둘은 마법사도 아니었고, 우승자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걸어온 삶의 곡선은 비슷했으나 그마저도 사라졌다. 둘은 서로에게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성질은 더 억세지면 억세졌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재회를 기약하는 게 힘든 고별의 순간이다. 더는 맞물리지 못할 지점에 도달한 순간, 안소니는 지금이 적기라는 걸 깨달았다.

 자신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인간과 너덧 번씩 조우한 게 과연 필연인지 우연인지.

 만약 이 조우가 우연에 불과하다면 우연인 대로 끝나게 냅두면 그만일 테고 필연이라면. 뭐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황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좀 웃고 마는 게 끝이겠지. 어떤 쪽이든 지금으로서는 상관없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앞으로는 묘연해질 인간에게 해 줄 배웅 인사란 시시하게도.

 "또 봐."

 그가 건네 준 인사를 돌려 주는 것이다.

 세상은 그때와 달라졌다. 파리에 위치했던 저택은 주인이 뒤바뀌었고, 지팡이와 가방 하나만을 들고 이곳저곳을 유랑하던 남자는 빈 손이 됐다. 모든 게 예측할 수 없는 지점으로 휘말리고 있다. 능소능대했던 동족의 두 손이 잘린 이상 운명을 점칠 수단조차 없다. 그 누구도 앞을 내다보고 있다며 자신할 수 없다. 운명을 기대하던 이든, 운명을 거스르려는 이든. 이제는 완벽하게 보이지 않은 인력의 힘을 뿌리쳐야만 했다. 단지 텍사스에서 떠오르는 태양은 스코틀랜드에서 툭하면 오운에 가려졌던 태양과 달리 타오를 듯이 눈 부셨다. 그 아래에서 선 둘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서로를 분명하게 볼 수 있다. 마지막을 예비해 둔 것처럼 안소니는 카리스를 바라봤다. 창백할 정도로 흰 뺨이라든가, 건조하다 못해 일순 메마르기까지 한 낯, 차가워서 베일 것 같이 새파란 눈. 차창만을 두고 떠나보내는 얼굴은 정말이지…….

 조금도 애틋하지 않아서.

 "그래."

 카리스는 깔끔하게 대답한다. 실체없는 기약만이 둘이 나눈 인사의 전부였다.

 인사까지 나눈 이상 더 미적거릴 이유는 없었다. 인사가 끝나자마자 카리스는 등을 돌렸다. 미련없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안소니는 카리스가 인파 사이에 섞일 때쯤에야 시동을 걸었다. 머스탱을 돌려 지금까지 밟아온 도로를 다시 밟아 힘차게 달려 나갔다. 그건 자신이 어디로 가야 될지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