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allel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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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크 접시 위에 담긴 5프랑

 

 

 

스테이크 한 접시에 들어가는 노력을 환산하라.

이는 난데없는 질문이다.

 

질문에 대답부터 한다면 스테이크에서 주체가 되는 양 한 마리가 가질 슬픔은 제쳐두고, 그 외 과정에서 몇몇 사람이 겪을 인내와 수고, 약간의 땀. 경시되기 쉽지만 경시돼서는 안 될 무게까지 저울에 올린다면 그건 대략 5프랑이다. 가격을 책정하는 기준은 간단하다. 파리 한복판에 있는 음식점에서는 5프랑을 지불하면 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다. 스테이크에 곁들여 먹는 가니쉬를 더 달라고 해도 추가 비용은 필요 없다. 포크로 스테이크를 찍어 누르고 나이프로 잘라내는 짓도 용인된다. 심지어는 스테이크를 바닥에 떨어트려도 이 5프랑만 지불한다면 스테이크를 또 시켜먹는 게 가능하다. 음식점에서 저장하는 고기가 동이 나지 않는 이상 스테이크를 언제까지고 먹는 것이다.

 

세상에 먹고 마시며 느낄 수 있는 모든 건 환산이 허용하는 선에서 거래된다. 저울이 평형으로 유지만 된다면 거래는 손쉽게 이뤄진다.

다만 스테이크와 달리 환산이 불가능한 것도 있다. 그건 세상의 절반을 내어 준다고 해도 가질 수 없다.

지간테는 손이 귀한 가문은 아니었다. 안소니는 외동으로 태어나 형제가 없었지만 다섯 손가락은 되는 사촌이 있었다. 가문끼리 왕래가 잦은 탓에 사촌과는 거의 한 집에서 나고 자랐는데, 나이 터울이 큰 사촌을 제외하면 안소니와 나잇대가 엇비슷한 사촌은 셋이었다.

 

안소니는 어린 시절에 유약하지 않았다. 새벽에 침실이 아닌 나무 위로 올라가 보기도 했고, 밖에서 뛰어놀다가 다리를 접질러 보기도 했다.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또래와 비교한다면 활달했다.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하기는 했어도 아이라는 특성상 돌출된 건 아니었다. 일반인이 보는 기준에서 안소니는 모나지 않은 어린아이였다. 관찰하면 어딘가 특이하기는 하지만 나잇대를 보면 이상해하지 않고 넘어갈 만한 아이였다. 문제라면 사촌들이 가진 성격이다.

 

오전 7시, 멜리아는 머리를 묶어 달라고 했다. 흰 양 인형 한 마리를 품에 안고 한 요구였다. 오늘 친한 친구인 조에와 함께 몽마르트에 가기로 약속이 잡힌 탓이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깨워진 안소니는 베개에 뺨을 누른 채로 멜리아를 쏘아봤다. 멜리아는 흰 양처럼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거절하면 순순히 알겠다고 하고 갈 표정이지만 멜리아가 태어나던 순간부터 옆에 있던 안소니는 저 요구를 거절하면 어떻게 될지 잘 알았다. 머리를 묶어 주는 것보다 더 한 뒷감당을 해야 될 것이다. 이럴 때는 빨리 요구를 들어주고 풀려나는 게 상책이다. 안소니는 끈을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멜리아는 그 손바닥에 끈을 얹어 주고,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빗까지 쥐여 줬다. 안소니가 졸음기가 묻은 얼굴로 익숙하게 머리를 빗겨 주자 멜리아는 인형을 꼭 끌어안고 기다렸다. 머리를 빗겨서 묶어 주는 것 정도야 다른 사촌이 요구하는 일과 비교하면 괜찮은 축에 속했다. 멜리아는 사촌 중에서도 가장 어린 나이여서인지, 안소니에게 하는 요구가 심각하지는 않았다. 다른 사촌이 하는 요구가 문제였다. 머리를 다 묶어 주자 멜리아는 손을 들어 뒷머리를 매만졌다. 삐져나온 부분이 없는지 거울까지 보고 확인한 뒤 자기 품에 있던 양 인형을 안소니에게 안겨 줬다.

"이거 선물이야."

그냥 가지고 가기가 귀찮은 거겠지……. 생각하던 안소니는 군말 없이 양 인형을 안았다. 숙모와 함께 저택을 떠나는 멜리아를 배웅해 줬다. 배웅해 주고 시계를 보니 7시였다. 안소니는 침실로 가서 양 인형을 옆에 던져둔 채 다시 잠들었다.

여름 휴가가 시작돼서 보바통에 간 사촌들이 돌아온 시기였다. 하나가 줄어들었다고 해서 저택이 조용한 건 아니었다.

오전 9시, 안소니는 얼굴에 뭔가가 묻은 걸 느꼈다. 무시하고 다시 잠들기에는 뭔가 찐득했다. 눈을 뜨자 바로 앞에서 고심하는 녹색 눈과 마주쳤다. 실리였다. 실리는 눈이 마주치자 놀라서 가까이 붙어 있던 간격을 벌렸다. 손에 루주를 든 채 말했다.

"왜 벌써 일어나?"

미안하다는 기색이 서려 있지만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은 건 아니었다. 손으로 얼굴을 만져보지 않아도 알았다. 뺨에 묻은 건 분가루고, 입술에 바르려고 하던 건 루주였다. 침대 밑을 보니 루주가 너덧 개 널려 있다. 자신에게 무슨 루주를 바를지 고민하던 것이다. 안소니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확인을 위해 손가락을 들어 제 뺨을 한 번 만져 봤다. 역시나 손가락에는 흰 분가루가 묻어 나왔다. 손가락에 묻은 분을 보고 얼굴이 썩자 실리는 찔리는 듯 루주 뚜껑을 닫았다. 안소니는 인상을 찡그린 채 물었다.

"너야말로 뭐 해?"

"그야 너 치장해 주고 있었지……."

"인형 놀이하고 있었던 거겠지."

"그것도 맞고……."

실리는 속 뒤집어지는 말만 골라서 하는 재주가 있었다. 안소니는 더 대꾸하는 걸 포기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욕실로 들어가서 찬 물을 틀어놓고 머리에 대 흘러내리는 물로 얼굴을 씻어 내렸다. 피부가 따가울 때까지 얼굴을 문대자 그제야 말끔해졌다. 욕실에서 나왔을 때 실리는 침대 밑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하도 문대서 벌게진 얼굴인 안소니를 보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이거 한 번만 발라 보면 안 돼?"

안소니는 수건을 발치에 버려뒀다.

 

오후 2시, 실리는 소파에서 낮잠을 잤고 안소니는 그 옆 의자에 앉아서 축음기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었다 독일 음악가가 작곡한 노래로 알고 있는데 누구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잔잔하던 선율이 마지막에 가서는 확 꺼진다는 것만 알았다. 선율이 밑으로 고꾸라질 때쯤 둔탁한 소리가 났다. 묵검이 카펫 위로 던져졌다. 

안소니는 목검을 줍지 않았지만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서 주우라는 듯이 제스처를 취했다. 목검을 들어 가슴에 겨눈 것이다. 그 검은 카펫 위에 버려진 검과 똑같은 검이었다. 물푸레나무를 깎아 만든 검, 지팡이가 되지 못하고 검이 된 나무가 가슴께에 겨눠졌다. 무례하지만 익숙한 행위였다. 안소니는 검 끝을 따라가 검을 든 상대를 바라봤다. 백금색인 머리카락과 상기된 볼이 보였다. 나딘이다.

나딘은 안소니 또래 사촌 중에서도 가장 맏이이자, 그만큼 비위 맞추기가 어려운 상대였다. 그건 나딘이 가진 고질적인 성격 탓도 있지만 주된 이유는 취미 때문인데. 나딘은 마법사지만 지팡이로 겨루는 것보다 검을 맞붙이는 것에 더 흥미를 느꼈다. 검술에 푹 빠져서 틈만 나면 목검을 휘둘렀다. 그건 보바통에 입학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머글 거리를 나다니다 우연히 본 결투 클럽이 원인인 것 같았다. 지간테는 순수혈통 중에서는 개방적인 편이지만 그래 봤자 순수혈통이다. 머글 문화에 해박한 게 아니었다. 나딘은 삼촌을 졸라 검술 책을 선물 받았고, 검술을 쓸 상대로는 안소니를 골랐다. 안소니는 짚으로 된 인형보다 더 나은 상대였다. 순발력이 괜찮아서 검을 피할 줄도 알고 때로는 검을 높이 휘두르기도 했다. 나딘과 달리 안소니는 검술에는 관심이 쥐뿔만큼도 없었다. 순수혈통 자제가 갖는 머글에 관한 무지를 제외해도 검술에는 흥미가 부족했다.

 

등받이에 늘어져 있던 안소니는 제게 겨눠진 칼끝을 잡아당겼다. 나딘이 힘을 주지 않자 더 깊숙이 당겨 칼끝을 제 가슴 쪽에 닿게 했다. 나무로 된 검은 가슴에 찔려도 아프지 않았다. 감촉만 느껴질 뿐이다. 만약 나딘이 있는 힘껏 찔러 넣는다면 사정이 달라지겠지만 아직은 그럴 기미가 안 보였다. 안소니는 검날을 잡아 의자 팔받이에 기대게 뒀다. 의자 바로 앞에 선 나딘에게 말했다.

"하기 싫다고 해도 하자고 할 거지."

"오랜만에 봤는데, 이거 하나 못들어 준다고 하는 거면 실망이야."

"너랑 한 번 싸우면 몸이 남아나질 않으니까 이러잖아."

"엄살 부리지 마."

나딘은 단숨에 의자 위로 올라섰다. 의자에 늘어진 안소니 위로 깔아뭉개듯 누웠다. 검날로 목을 건드렸다.

"이런 걸로 힘들어하면 어떡해?"

그 말에 안소니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채 자기 위에 짐짝처럼 누운 사촌을 바라봤다. 나딘은 협박하듯 체중을 실었다. 안소니가 못이겠다는 어조로 말했다.

"이런 건 누구라도 힘들어해. 특히 너 같은 사람은."

"넌 세상에 별사람이 다 있다는 걸 아직 모르는구나. 이 정도는 새발의 피라고."

"그런 사람은 피하면 그만이지."

나딘은 눈을 찡그리며 비웃었다. 날을 잡아서 들어 올리더니 손잡이 부분으로 안소니 어깨를 쳤다.

"아니. 넌 분명 나보다 더 이상한 사람 만날 거야."

확신하는 어조였다. 안소니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 말을 무시했다. 얼마 안 가 그 말을 들었다는 사실조차 까먹었다. 악담이라 하기에도 뭐 한 말은 기억 저편에 묻혔지만 말에는 이상한 힘이 있다. 어떤 말은 사람을 끌어당겼다.

 

섭취는 인간이 가지는 기본 욕구다.

생명 연장에 필수 수단이나 다름없는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인간은 식사를 한다. 식사 방식은 제각각 다채롭다. 자신이 직접 음식을 만들어서 먹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만들어 준 걸 냉큼 먹기도 한다. 남이 먹으려고 만든 음식을 뺏어먹기도 한다. 셋은 인류사가 시작된 이래 빈번했다. 시기에 따라 어느 한쪽에 쏠리면서도 균형을 이뤄왔다. 욕구에는 섭취 욕구만 있는 건 아니었다. 사람과 눈을 맞추면서 대화해야 성이 풀리는 욕구부터 한 곳에 붙들리지를 못해 이곳저곳 돌아다녀야 되는 욕구, 울 때는 있는 힘껏 소리 내며 울어야 된다거나 하다 못해 비가 내리면 온몸을 젖게 하고 싶다는 욕구까지.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사소하고 중대한 욕구가 인간을 지배했다.

 

욕구가 말살된 인간은 죽고, 죽지 않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살아간다. 걔 중에는 단 1분이면 해소되는 욕구가 있다, 삶을 다 바쳐도 해소되지 못하는 욕구가 있다. 거대해져 열망으로 변한 욕구도 있다.

안소니는 단 한 번도 죽지 않은 채로 살아왔다. 죽은 것 같다고 느껴지던 순간에도 살아 있다고 느꼈다. 욕구를 느낀 적은 무수하나 열망을 느낀 순간은 유일했다. 마법부에 들어가 E.W.A 좌석에 앉은 건 그 때문이다. 욕구라고는 치부하지 못할 열망이 삶을 그러쥐였다.

"신문 봤나?"

제 25회 헝거 게임은 다른 회차와 달리 우승자 수가 넉넉했다. 그래서인지 우승자가 신문에 도배되거나, 소문에 등장하기도 했다. 이번 우승자는 두 경우 모두 해당됐다.

"페어웰에 자식 둘 빼고 모두 죽었다는 거. 저택까지 불태워졌다고 하는데……. 장남은 실종되고 차남만 살아남았다지?"

헝거 게임에 참가하는 건 명예라고들 하지만 명예에는 불운이 따르기도 한다. 순서가 뒤바뀌어 불운으로 명예를 얻기도 했다. 불태워진 저택에서 홀로 살아남았다는 차남은 우승자라는 영광에 걸맞게도 여기저기서 말이 떠다녔다. 페어웰 저택을 태운 화재는 그가 가진 확률을 떠들게 만들었다. 그는 없다고 봐도 무방한 확률에서 두 번 살아남았다. 극적인 이야기에 이목이 쏠리지 않는 게 이상했다. 여기에서 누구라도 떠올릴 만한 의문이 있다.

"쿼터 특집 우승인이라면 안소니도 알겠군."

그가 살아남은 건 행운인가? 아니면 불운인가?

안소니는 상사가 혼잣말처럼 한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눈이 뻑뻑한 듯 눈가를 손가락으로 누르면서 서류철을 보기만 했다. 상사가 한 말을 끝으로, 시끌벅적하던 사무실에 한 차례 침묵이 돌았는데도 태도는 여전했다. 옆에서 같이 서류 작업을 돕던 동료가 팔을 건드렸을 때쯤에야 안소니는 서류철에 박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어느샌가 이목이 집중된 걸 보고 나서야 아, 하고 뒤늦게 반응했다. 손에 들린 서류철을 흔들면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걸 보고 있었거든요. 무슨 말하셨죠?"

"이번에 페어웰 가문에서 난 화재 사건 알지. 장남은 실종돼서 사실상 죽은 거나 마찬가지고. 차남만 살아남았다고 하던데……. 혹시 차남이랑 친분이 있는가?"

잿빛 눈이 무구하게 깜빡였다. 안소니는 들은 말을 정리라도 한다는 듯 서류철을 탁자 위에 뒀다.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뜸을 들이더니 대답했다.

"글쎄요. 얼굴은 몇 번 봤는데. 그게 다라서요."

조공인 중에서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알코올 중독자처럼 술에 찌들어서 살거나, 자발적으로 벌을 받기라도 하듯 제 몸을 망치는 사례가 허다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어 자기 파괴적인 행위에 몰두하는 것이다. 살인이나 폭력을 휘두르고 느끼는 죄책감은 사회화된 인간에게는 당연하다. 그 상대가 이제까지 함께하던 친구라면 죄책감이 깊어지는 건 말할 것도 없다.

물론 모두 조공인이 죄책감을 빌미로 삼아 자신을 망치려고 드는 건 아니었다. 죄책감이 아닌 다른 감정에 몸을 내맡기는 우승자도 있다.

안소니가 말을 이었다.

"안타깝네요. 친구를 잃은 지도 오래 안 됐으니까요."

그게 제정신은 아닐 뿐이었다.

 

지팡이가 겨눠졌고 수십 개 빛이 반짝였다. 지난 몇 년 동안 살인자가 되게 만든 게임을 경멸했다. 모순되게도 또 한 번 살인자가 되는 순간은 짜릿했고…….

그건 찰나였다.

E.W.A라는 구실점이 사라지고 난 뒤 조공인은 세계 각지로 흩어졌다. 집단에 소속됐기는 하지만 개개인은 집단에 애정은커녕, 상사에 대한 살의까지 내비치던 걸 생각하면 E.W.A의 해산은 실로 축복받을 만한 사건이다. 6년이란 시간은 한 사람이 달라지기 충분한 시간이다. 안소니에게 생긴 변화는 크다면 컸다. 이제는 폭력을 휘두르지 않게 됐고 넥타이도 깔끔하게 맬 줄 알았다. 더는 분노에 시달리지 않아도 됐다. 이제 파리를 넘어 유럽 전역에 게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 몫으로 남은 일도 없다. 우승인 출신으로서 협회에 얼굴을 내밀거나, 경기장 곳곳에 깔린 조공인을 보며 남은 수명이 어느 정도인지 셈하는 것. 죽음을 독촉하듯 다 비워진 찻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것. 어서 죽어 게임이 끝나기만을 바라는 양 천장이나 바라보는 것.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잔인한 시대를 넘어 안온한 시대다. 우리에게 남은 일이라곤 기억을 더듬을 때 서로가 미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주는 일이 고작이다.

 

귀가가 늦어진 건 스페인에서 살인을 저지른 마법사가 프랑스, 걔 중에서도 니스로 기어갔다는 소식이 들어와서다.

 

안소니는 파리에 거주했고, 오러 소속은 아니기에 살인자가 니스로 꽁무니를 빼든 말든 알 바는 아니었지만 혹시 모를 사태는 대비해야 됐다. 스페인에서 파견한 마법사는 불어가 능숙했다. 먼 곳에서 온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우린 홍차는 진한 향이 났다. 마법사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사건에 대한 협조를 요청한 뒤. 얼른 일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티를 팍팍 냈다. 고국을 집으로 바꿔 부르자면 안소니도 처지는 똑같았기에 얼추 이해관계는 딱 들어맞았다. 떠맡은 짐덩어리를 빨리 해결하기 위해 대화는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스페인 출신 살인자가 어둠의 마법에 능숙하고, 오른쪽 입가에 흉터가 있다는 점. 부러진 지팡이로도 마법을 사용했다는 점. 냄새나는 하수구에서 피 튀기는 혈투를 했음에도 놓쳤다는 점까지 숙지하고 나서야 대화는 끝이 났다. 접견실에 혼자 남게 된 안소니는 오러 본부에 협조 요청을 전달했다. 서류철까지 정리를 마쳤을 때 시계를 봤다. 오후 6시.

오늘은 수요일이다.

피로도만 제외하면 집에 언제 기어가든 중요한 건 아니었다. 실제로 안소니는 마법부에 들어간 이래 지난 6년은 기계처럼 일만 했다. 기계라는 단어가 세상에 있는 줄 모를 혈육도, 길게 연애해서 서로 집에 드나드는 연인도 없는 집이었다. 집에서 나는 인기척은 귀한 편이었다. 주거지로서 이외 의미가 거세된 집은 적막했다. 집에 객이 하나 머무른다고 해서 안소니에게 큰 변화는 없었다. 변화를 딱 하나만 꼽자면 어지간해선 약속을 잡지 않고 집으로 귀가한다는 것이다.

4일은 규칙으로 정하기엔 짧다. 5일째가 되는 날은 이게 규칙인지, 변덕인지. 판가름을 하기에 적당한 시기였다.

집에 발 들이자마자 컥컥거리는 소리가 났다. 안으로 들어서면 식탁에는 빵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언제나처럼 새하얀 프랑스산 빵. 부드럽지만 한 달 내내 먹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부실했다. 소리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섰다. 목 막힌 건 뚫렸는지 고양이 한 마리가 고깃덩어리를 먹어치웠다. 침대에 누운 채로 고양이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오늘부터 수요일은 변덕이 아닌 규칙이 된 것이다.

 

"어디에 갔다 왔어?" 그는 안내역이 없어도 프랑스 전역을 잘만 돌아다녔다. 며칠 거들어 주기는 했지만 휴가를 받지 못한 직장인이란 사실은 큰 애로사항이다. 돌아다니면서 별일은 없었는지, 있었다면 무슨 일이었는지. 가다가 소매치기는 안 당했는지. 요즘 머글들이 혁명이란 걸 하는데 시끄럽지는 않았는지……. 누구든 물어볼 법한 질문을 하고, 누구든 대답할 말을 했다. "오늘은 몽땅베르에 갔다 왔어." 가끔 누구든 대답하지 않을 말도 얹었다.

"특별한 일은 없었어. 프랑스인이 아니라는 말만 3번 한 거 빼면."

"네가 어디로 봐도 프랑스인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남자가 있는 맞은편에 가 안소니는 의자에 팔을 기댔다. 남자에게 말했다.

"발음해 봐."

"어제도 네 면전에다 몇 번은 말한 것 같은데."

"이참에 선생 노릇에 열정을 가져 보려고."

몇 주간 동거했지만 가르친 문장은 3개에 불과했다. 술 한 병 주세요, 라이터랑 담배 주세요, 저는 저 집에서 살아요……. 며칠 전에야 저 말이 추가됐다. 남자는 빵을 우물거리는 걸로 반응을 대신했다. 그가 이전에 보인 태도가 그랬듯이 무신경했다. 안소니도 남자를 따라 빵을 한 입 먹었다. 프랑스인이라고 해도 빵만 먹고사는 건 아니었지만 파리 출신인 빵은 맛있었다. 빵은 식전에 주린 배를 채울 간식으로도 유용했다.

남자는 지팡이와 가방만 들고 프랑스에 왔다. 처음부터 목적지가 파리였던 건 아니었다. 파리는 남자가 들리게 된 서른두 번째 도시였다. E.W.A가 와해되고 몇몇 조공인은 행방이 묘연했다. 남자도 그중 하나였는데, 이제 보니 세계를 유랑하기로 나선 것이다. 프랑스 야경을 등지고 선 남자는 들려줬다. 참사추이에 가서 만난 늙은 노파가 들려준 얘기를, 세상을 다 돌아본다면 찾지 못할 게 없을 거라는 말은 남자를 서른세 번째 도시까지 오게 했다.

남자와 몇 주간 동거를 하게 된 건 어디까지나 우연이다.

안소니는 남자에게 안 쓰는 방을 내어 주고 휴일이면 안내역을 맡아 줬다. 다만 안소니도 프랑스 곳곳을 누비고 다니기는커녕 파리 옆에 있는 로렌에도 못가봐 안내역으로서 훌륭하지는 못했다. 없는 것보다는 나은 수준인 동행인으로 움직였다. 프랑스에 머무르면서 남자가 들린 도시는 늘어났다. 그 시간 동안 안소니는 전부터 남자에게서 알고 있던 사실을 되씹었다. 혹은 덧대서 추가했다.

스칸디아나 반도에서 온 남자는 허공을 보고 혼잣말을 하거나, 잡동사니를 던지고는 했다. 프랑스에는 편견이 있고 몽마르트 언덕 위에서 본 야경이 마음에 찼던 것 같다. 그리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조공인 출신이라면 기본 소양처럼 지니는 지병을 짚고 넘어간 건 아니었다. 그는 여타 조공인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몇 주에 불과한 동거 생활을 하면서도 안소니는 그를 병원에 데리고 가거나, 약이 어디 있냐고 묻지 않았다. 왜 그러냐고 캐묻지도 않았다. 대신 남자가 허공과 대화를 나눌 때는 곧잘 끼어들거나 집어던진 물건을 손으로 잡았다. 제자리에 놓고서는 그 옆에 앉았다. 프랑스에 가진 편견은 냅둬도 문제가 없을 것 같으면 그대로 냅뒀다. 다른 곳과는 달리 몽마르트 언덕 위로는 두 번을 갔다. 의도해서 그랬다기보단 가다가 길을 잃어버렸다. 제정신이 아닌 인간을 보면 고치려고 드는 게 정상인이 하는 행위였다. 안소니는 자신이 정상인이라는 사실은 의심하지 않았다. 단지…….

 

제 자신을 꼭대기에 올려놓는 남자는 제정신이 아닐지언정 죽으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안소니가 그를 고치려고 들지 않은 이유였다.

남자가 괜찮은 레스토랑을 발견했다고 해서 가게 된 레스토랑은 그 말대로 괜찮았다. 분수대가 보이는 야외 레스토랑인데, 분수대 앞에서 길거리 음악가가 연주를 했다. 연주는 아름다워 몇몇이 그 앞에서 연주를 듣고, 가방 안에다 동화 몇 잎을 던졌다. 웨이터가 주문을 받으러 간 뒤 남자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담뱃갑을 꺼내더니 담배를 손가락 사이로 잡았다. 식사 자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짓은 무례했다. 그러나 신성모독적인 행위를 옮기는 데도 거리낌이 없는 마법사에게 예의란 거추장스럽다. 남자가 담배를 꼬나물었을 때 안소니는 라이터를 딸깍였다. 불꽃이 튀자 팔을 뻗어 남자 코앞에 대 줬다. 불꽃이 짧게 일렁거렸다. 남자는 고개를 가까이해 불을 붙였다. 그때 식탁 위로 웨이터가 음식을 놓아줬다. 남자 앞에 놓인 음식은 양고기 스테이크였고, 핏물이 나오는 레어였다. 안소니 앞에 놓인 건 와인에 절인 소고기 스테이크였다. 나이프로 안을 잘라도 선홍빛이 보이지 않는 미디엄이다.

 

식사를 하던 와중에 안소니가 다섯 이름을 가진 남자에 관해서 말을 꺼냈다. 한 연인에게 구속되는 건 구세대적 관습이라고 설파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꺼낸 건 케니스와 만남을 가져서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늙은 노파가 들려준 이야기에 관한 화답인 것이다. 다만 다섯 이름을 가진 남자와 제 앞에 앉은 남자는 다른 남자였다. 관심이 있다면 다리를 놔줄 수도 있다는 말에 그는 일절 고민하지 않고 거절했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남자 말대로 제게는 어울리는 방식이 아니기도 했다. 안소니는 있는 그대로 수긍하기보다는 다른 말을 꺼냈다.

"넌 세상을 다 둘러볼 거라고 했지."

 

노파가 한 말은 카리스를 이끌었다. 세상을 다 둘러본다면 찾고 싶은 걸 찾을 거라는 말. 그게 진실이냐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끌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자신도 머무르는 것보다는 떠나는 게, 떠난다면 발 묶인 곳 없는 게 적성에 맞았다. 그걸 알면서도 파리에 발 묶인 건 이런 삶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원동력을 잃는 삶이란 무색무취다. 향도 나지 않고 맛도 없었다. 반지가 끼워져 있던 맨손가락을 다른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두 단어를 곱씹었다.

사랑과 복수.

어머니가 알려 주려던 사랑은 뒷전이 됐다. 삶을 송두리째 바쳤던 복수는 이뤄냈다. 열망하던 걸 손에 쥐였다는 짜릿함은 잠시였다. 복수로만 채워졌던 삶에 복수를 잘라내자 남은 자리는 모조리 빈자리가 됐다. 안소니는 일단 빈자리를 냅두기로 했다.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제 삶을 채웠던 건 우연이 가져다준 게 컸다. 자의와 타의가 반씩 섞인 삶에서 안소니는 반지를 끼고 다녔고, 어머니가 남긴 숙제를 풀려고 했다. 그 학년이 돼 트리위저드에 참가했고, 복수를 이뤄내기 위해 마법부에 들어왔다. 6년이 지나면서 사랑은 떫은맛이 나는 찻잎으로 변모했다. 다 이룬 복수는 이제 땅에 묻어야 될 과거가 됐다.

과거를 땅에 묻는다고 해서 자신까지 땅에 들어가지는 말아야 한다. 향도 나지 않고 맛도 없는 음식을 씹어먹는 버릇을 들인 건 그 이유였다. 헝거게임은 사라진 역사가 돼 버렸다. 우리가 주축이던 역사는 지워졌고, 남은 건 기억이다. 역사는 전복돼서 재로도 안 남았다. 제 앞에 놓인 건 멋들어진 음식이다.

 

세계는 여러 대륙으로 나눠졌다. 대륙에서도 수십수백 개 나라가 흩어져 있다. 늙은 노파가 한 말이 맞는지, 아닌지. 시험하기 위해 떠돌 남자는 이름 모를 국가를 밟고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언어를 발음할 것이다. 걷는다면 발자국이 찍히는 하얀 눈밭, 신발에 고운 모래가 한두 알 들어가는 사막, 발로 거닐 때는 발바닥에 초록 녹음이 묻어나는 초원까지…….

도시에 갖는 인식은 가지각색이다. 프랑스. 그 중에서도 파리에 갖는 편견은 유명하다. 사랑과 낭만에 찌들고, 열정에 몸 불사지르는 도시. 더티 블론드를 가진 프랑스인도 그 편견에 한 축을 담당했으리라 추측한다. 편견과는 달리 자신에게 파리는 복수의 도시였다. 파리에 정착한 이유는 오직 복수 때문이다. 안소니는 선뜻 말했다.

 

"너한테만 말해 주는 거지만 난 파리를 싫어해."

 

복수를 멋지게 이루고 난 뒤 세계는 한결 평화롭다. 죽음과 폭력, 광기에서 벗어난 마법사에게 남은 건 자유다. 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잊고 있던 자유 말이다. 자유는 공허했다.

역사는 잊혀졌고 기억이 지워진 인간들은 원래 제 것이었다는 마냥 평화를 누린다. 그건 특권이다. 이제까지 자신을 이루던 것 일부가 날아갔다. 복수를 빼자 자신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사랑과 낭만의 도시. 별빛이 하늘에 물들여지고 향락이 넘쳐난다. 붉은 피와 푸른 깃발, 흰 대포 소리가 나동그라진다.

자신은 파리를 싫어한다. 파리는 복수를 이뤄 주는 대신 다른 걸 다 삼켜 버렸기에.

그걸 되찾기 위해서는 뭘 해야 될까. 6년이란 시간을 땅 속에 묻어두고 나니 감이 안 잡혔다. 아마 영영 안 잡힐지도 몰랐다. 사람은 살아가야 될 이유가 없어도 살아간다. 인구 대부분은 목적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다. 인구 대부분에 끼게 될지, 아니게 될지는 아직 모른다. 단지 남자가 들려준 얘기를 듣고 난 뒤 문득 예감한다. 남자가 세상을 둘러보기 전에 찾고 싶은 걸 찾는다면 자신도 그걸 찾을 수 있으리라.

리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술에 취한 듯이 흐트러진 웃음소리다. 누가 낸 건지도 모를 웃음소리에 기분이 괜찮아진다. 안소니는 나이프를 내려놓은 뒤 어깨를 느슨하게 폈다. 버릇처럼 짧게 사라지고 말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프랑스에 오면 나를 만나러 와."

근데 너무 늦으면 내가 없을지도 몰라. 그 말을 덧붙였을 때쯤 미소는 다시 사라졌다. 헤어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작별 후 만남을 기약하는 건 그가 곧 떠나리란 예감이 들어서다. 헤어지는 게 예정된 사람들은 인사가 쉽다. 이건 인사는 아니지만 인사 대용으로 쓰는 게 가능한 말이다. 안소니는 갈레온을 버려둔 채 일어섰다. 핏물에 젖지 않고 바짝 구운 고기를 보며 하는 돈으로 환산이 안 될 가치에 관한 생각이다. 은화를 잃지 않기를 고대한다. 남자가 세상을 다 둘러보기 전에 찾을 건 이 땅에 있는 은화를 다 쥐여 주고, 세상의 절반을 내어 준다고 해도 바꾸지 못할 게 분명하다.

 

그건 분명 아름다울 것이다.